[경제 돋보기]
[허윤의 경제돋보기] 안보·통상 분리 시대는 끝났다
[한경비즈니스=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일제하 강제징용 배상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에 일본은 대한국 수출 규제라는 통상 이슈로 제동을 걸고 나섰다.

과거사와 관련된 외교적 사안을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교차 보복하는 일본의 행태를 두고 ‘글로벌 분업 체계의 핵심인 국제 공급망을 흔드는 심각한 도발 행위’라며 국내외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외교·안보 문제를 경제·통상 이슈로 연계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계속된 강대국의 협상 관행으로 보인다.

과거 서구 열강들은 약소국이 항구를 열지 않으면 군함을 몰고 와 대포를 쏘았다. 중국은 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에 불만을 품고 중국에 진출한 롯데마트와 현대자동차를 교묘하게 공격했고 한국행 단체 관광을 금지한 바 있다.

미국은 핵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는 북한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고 안보상의 이유를 걸어 심지어 동맹국 한국에까지 철강 수출에 쿼터(물량 제한)를 부과한 상태다. 경제 대국 일본이 외교적 사안을 전략물자 수출 제한으로 한국에 응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세계 역사에서 안보와 통상이 그나마 분리돼 세계 각국이 안보에 신경 쓰지 않고 수출에만 힘쓸 수 있었던 시기는 1990년대 초 탈냉전 이후 도래한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한국도 1992년 중국·베트남과 수교하는 등 북방 정책을 서둘렀고 이후 이들 국가의 부상과 함께 경제적 혜택을 상당히 누려 온 것이 사실이다.

이 기간에 한국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는 무역 상대국의 이익 증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무역을 자국의 효과적인 경제성장 전략으로 채택, 안보상의 적과 동지를 구별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즉 통상의 ‘안보 외부성’을 무시하고 돈벌이에만 몰입한 셈이다. 통상의 ‘안보 외부성’은 A국이 B국과의 무역으로 얻는 이익의 일부로 A국의 군사력을 증강시켜 B국을 위협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과거에 군사 동맹국끼리 군사동맹 합의문에 경제적 협력을 명시적으로 적시해 이런 ‘안보 외부성’을 회피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에 대한 신뢰가 명확한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1930년대 유럽 각국은 심각한 보호주의로 치달으며 관세와 환율 전쟁을 벌이다 결국 물리적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까지 촉발했다.

이후 전승국인 연합국들은 ‘세계 각국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높여 전쟁이 터지면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되는 국제 분업 체계를 확립하겠다’는 대명제 아래 비교 우위에 의한 글로벌 생산·공급망 심화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투자 협정 등을 통해 뒷받침했다.

솔로몬 폴라첵 뉴욕주립대 교수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양국의 무역이 2배가 되면 상호 적대감이 20% 줄어드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A국이 B국에 엄청나게 투자하면 그 매몰비용으로 인해 B국은 A국의 희생을 강요하는 저지 전략을 펼칠 수도 있다. 사드 보복이 이에 해당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이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대한 우려와 함께 미국 경제 재건이 국가적 어젠다로 떠오르면서 미국은 안보와 경제를 강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연계하는 신냉전 시대를 열었다.

미국은 동맹국 독일·일본·한국의 자동차에도 232조 안보 조항 적용을 고민하고 있고 중국은 한국이 사드를 본격적으로 배치하면 제2의 경제 보복을 감행할 태세다.

일본은 한국을 우방국 리스트에서 지우고 싶어 하는 이 혼돈의 시대, 미·중·일 3국에 몰아닥친 삼각파도에 한국호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6호(2019.08.05 ~ 2019.08.1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