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새판 짜이는 글로벌 통상 질서 [강문성의 경제 돋보기]
[한경비즈니스 칼럼 = 강문성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전 세계 무역과 투자의 규범을 관장하는 국제 통상 질서는 향후 1~2년 사이에 크게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유명무실해진 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 무역 체제, 글로벌 가치 사슬의 변화, 디지털 무역 등 새로운 무역 형태의 등장 등으로 혼란스러운 통상 질서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변혁의 촉진제’로 이용되고 있다. 코로나19를 명시적 또는 암묵적인 매개체로 활용해 변혁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WTO는 그동안 보호무역주의, 미·중 무역 마찰 등의 과정에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며 국제 무역 전담 국제기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게다가 회원국 간의 통상 분쟁을 해결하던 상소기구(Appellate body)는 상소위원의 임명 문제로 그 기능이 정지된 상태여서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결국 WTO의 미래는 164개 회원국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아무래도 다자 무역 체제에 대한 미국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의 WTO 체제에 불만이 가득한 미국으로서는 지금의 틀을 중심으로 WTO를 개혁할지, 아예 새로운 판을 깔지 결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올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WTO의 미래에 대해 적극적인 방향을 설정하기보다 문제점을 계속 제기하면서 중국과의 통상 마찰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다자 무역 체제에 대한 미국의 정책 방향은 대통령 선거 이후 결정될 것이다. 다만 현재 진행 중인 WTO 사무총장 인선 과정에서 만약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미국은 무난한 인물을 선호할 것이고 제3세계 출신의 후보보다 선진국 출신 후보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움직임은 코로나19가 핵심 변수인 글로벌 가치 사슬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역시 중국산 자동차 부품의 공급 차질로 한국의 완성차업계가 어려움을 겪어 효율성 중심의 글로벌 가치 사슬은 대안을 가진 리스크 관리 체계 구축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미·중 통상 마찰과 연계돼 또 다른 형태의 위험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인도·베트남 등의 국가에 공동으로 공급망을 구축하자는 ‘경제 번영 네트워크(EPN)’를 제안했다. 또 지난 7월 7일 공개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새 캠페인 계획에 따르면 바이든 후보 역시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동맹국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의 의존도를 줄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오는 11월의 대통령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미국 주도의 공급망 구축은 차기 미 행정부의 핵심 정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다른 변혁은 제도와 정책이 아닌 기술 발전에 기반한다.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에 따라 무역의 형태가 점차 디지털화된다는 것이다. 국경 간 무역이 복잡한 단계를 거치던 것이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단순화되고 있는데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 상품 업로드·번역·마케팅·통관·검역·세금·송금·창고·배송 등을 결합한 통합 서비스를 거쳐 무역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거래가 활성화됨에 따라 무역 형태의 디지털화가 앞당겨질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국제 통상 질서는 급격히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조망할 혜안을 가질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분석 외에도 국제 정치적 흐름을 이해하고 이러한 조류를 앞서 맞이할 통찰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86호(2020.07.18 ~ 2020.07.2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