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일대기③ 2000년~2020년
-끝없이 던진 성장화두…‘10년 후 뭘 먹고 살텐가’
[이건희 일대기]디지털 강자를 넘어 100년 기업으로
[한경비즈니스=이홍표 기자] 이건희 회장이 병상에 들기 직전 연도인 2013년 말을 기준으로 삼성의 계열사 전체 매출은 330조 원에 달한다. 신경영 선언 당시인 1993년 삼성의 매출액은 각각 29조 원에 불과했다. ‘핵심계열사’ 삼성전자의 매출은 220조 원에 달한다. 특히 영업이익은 36조 원이다. 미국의 경제 잡지 포천이 작년 7월 발표한 ‘글로벌 500’ 기업을 보면 지난해 분기 평균 10조 원이 넘는 이익을 올린 곳은 미국의 엑슨모빌과 애플, 가즈프롬, 중국 공상은행(ICBC) 등 4개에 불과하다. 한국 최대의 그룹사인 삼성, 이 중에서도 삼성전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글로벌 톱 기업’이 됐다.

2014년 1월 글로벌 컨설팅사인 인터브랜드는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를 336억 달러(42조6000억 원)로 지난해 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선정했다. 2003년 25위에서 2012년 최초 10위권 진입(9위)한 후로 꾸준한 상승세다. 일본의 도요타,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프랑스의 루이비통 등이 삼성전자보다 밑에 있는 브랜드들이다.

삼성전자는 수두룩한 세계 1위 품목을 가지고 있다. D램·낸드플래시·모바일AP 등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LSI 등 10여 개다. 완성품 쪽에서 보면 TV와 휴대전화가 독보적이다. TV는 이미 2006년에 1위에 올랐고 휴대전화는 2012년 1위에 올랐다. 이 모두 ‘천하의 삼성’도 1등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사업이다.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지 20여 년이 흘렀다. 이를 앞뒤 10년으로 나눠보면 신기하게도 ‘뉴 밀레니엄’ 시기와 맞물린다. 1990년대의 신경영이 ‘이건희의 삼성’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가며 내공을 쌓는 시기였다면 2000년대의 삼성은 그간의 쌓은 잠재력을 말 그대로 ‘폭발’시키는 시기였다.

◆‘디지털 시대’의 승자, 삼성전자
[이건희 일대기]디지털 강자를 넘어 100년 기업으로
“새 천년이 시작되는 올해를 삼성 디지털 경영의 원년으로 선언하고 제2의 신경영, 제2의 구조조정을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사업 구조, 경영 관점과 시스템, 조직 문화 등 경영 전 부문의 디지털화를 힘 있게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먼저 변화의 흐름을 읽고 전략과 기회를 선점하는 일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2000년 신년사를 통해 21세기를 선도해 나갈 전략이자 경영 방침으로 디지털 경영을 선언했다. 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대했다. 새 밀레니엄의 코드는 ‘디지털’이었다. 전자 산업의 패러다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던 선진국들과의 기술 격차를 단박에 줄일 수 있는 키워드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삼성이 있었다.

이 회장의 디지털 경영 선언은 21세기 초일류 기업의 비전을 달성하고 사업 경쟁력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아날로그 시대에 통용되던 모든 것을 바꾸자는 측면에서 1993년 추진한 신경영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이 회장의 주창한 ‘신질서’는 2000년 2월부터 본격화됐다. 당시 미국은 디지털 혁명의 중심으로 사상 최대의 정보기술(IT) 호황을 누렸다. 마이크로소프트·시스코 등 대표 IT 기업들의 실적이 급격하게 향상됐다. 애플은 2000년대 중반의 핵심 IT 제품이자 향후 스마트폰으로 발전하는 아이팟 출시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이 회장은 이 시기에 미국 오스틴에서 그해 첫 사장단 회의를 연다. 미국 IT 산업의 변화를 몸소 체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회장은 이 회의에서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뒤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앞으로 세계 1등이 될 수 없다면 문을 닫는 각오로 디지털 및 정보통신 제품,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반도체와 같은 핵심 부품에서 세계 1등 품목을 늘려가자고 역설했다.

◆‘출근’으로 삼성은 채찍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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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같은 해 4월과 11월에도 연이어 디지털 사업 분야 사장단 회의를 열고 앞으로 전개될 디지털 시대의 생존·발전 전략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이 같은 디지털 사업 일류화 추진은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맞물리며 각종 사업 등에서 사상 최대의 경영 성과를 일궈 내는 발판이 됐다. 동시에 훗날 반도체-휴대전화-TV-디스플레이로 이어지는 ‘황금의 사각편대’를 이루게 하는 토대가 됐다.

2011년 4월은 삼성이 또 한번의 전환점을 맞은 때다. 바로 이건희 회장의 ‘출근 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이 회장은 평소 출근을 잘 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이미 “내가 회사에 나오면 사장들이 눈치를 보느라 엉뚱한 일에 정신을 팔고 임직원들도 걱정된다”고 말했었다.

한두 번 나오고 말 줄 알았던 이 회장의 출근은 주 2회씩 정례화된다. 서초동 삼성타운에는 동시에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협력 업체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계열사 임직원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났다. 삼성의 컨트롤 타워인 미래전략실 인사팀장과 경영진단팀장도 전격 교체됐다.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2010년 삼성전자의 실적은 매출 154조6000억 원에 영업이익 17조3000억 원을 기록했다. 순수 전자회사 단위로 매출액은 세계 최고였다. 전 세계가 삼성에 주목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던 일본 전자 업계는 거꾸로 ‘삼성 배우기’에 나섰다. HP·IBM·소니·델 등도 모두 삼성전자 뒤로 밀렸다.

새 밀레니엄의 출발과 함께 이 회장이 주창했던 ‘디지털 시대’의 승자는 삼성전자였다. TV는 2006년 이후 부동의 1위였다. D램과 낸드플래시,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와 모바일 AP도 굳건한 위상을 지켰다. ‘부동의 휴대전화 1위’ 노키아를 턱밑까지 추격했고 ㅅㅁ성전자 주위엔 ‘갈채’만이 들렸다.

◆‘박수’가 들릴때 위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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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의 출근 배경은 곧 나타났다. “삼성이 다시 한 번 변해야 한다”는 위기감의 재점화였다. 당시 외견상 지표는 분명 괜찮았다. 하지만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애플과 구글이었다. 막강한 소프트웨어 경쟁력 그리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이룬 IT 생태계를 이룩한 이들 두 회사는 하드웨어의 최강자 삼성을 완전히 새로운 경쟁의 판으로 몰아넣었다.

2007년 내놓은 아이폰으로 급성장한 애플은 삼성 최대의 고객이다. 다른 한편에서 애플은 삼성과 지루한 소송을 이어가는 ‘적’이다. 애플이 삼성에 첫 소송을 제기한 날은 이 회장이 출근 경영을 시작한 지 불과 엿새 전이다. 구글도 마찬가지다. 삼성은 구글의 개방형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채용해 노키아도 쓰러뜨리고 만 ‘스마트폰 태풍’을 화려하게 돌파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구글과 삼성의 합작은 말 그대로 ‘불안한 동거’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 회장이 이런 걱정은 2011년 구글이 한때 삼성의 휴대전화 경쟁사였던 모토로라를 인수하면서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기도 했다. 삼성과 구글의 협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지만 언제든 경쟁으로 바뀔지 모르는 상황이다.

“지금부터 10년은 미래 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도전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21세기를 주도하며 흔들림 없이 성장하는 기업, 안심하고 일에 전념하는 기업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사업 구조가 선순환돼야 하며 지금 삼성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사업과 제품은 10년 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과 제품이 들어서야 합니다.” 이미 이건희 회장은 ‘출근 경영’ 전부터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2011년 1월 신년사에서 지금 삼성의 대표 사업은 10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이 같은 고뇌를 내비친 것이었다.

출근 경영의 또 다른 이유는 내부의 자만이었다. ‘역대 최대’라는 성과에 취해 있는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조직의 기강을 죄기 위한 것이다.

◆갤럭시S 신화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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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삼성은 다시 한 번 변했다. 사업 전반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새로운 미래 전략이 속속 수립됐다. 이 회장이 과거 신경영 때만큼 일일이 지시하고 독려한 것은 많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일반 직원들과의 점심 식사나 간담회를 여는 등 소통을 부쩍 확대했다. 위로부터의 개혁, ‘변화’의 공감대가 이뤄졌다. 꾸준히 축적된 삼성의 ‘변화’에 대한 잠재력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강이 바뀌었다.

기업의 미래를 보는 지표 중 하나는 주가다. 2011년 1월 7일 92만1000원을 기록했던 삼성전자의 주가는 그로부터 2년 후인 2013년 1월 4일 사상 최고가인 154만 8000원을 기록한다.

핵심은 스마트폰이었다. 2007년 애플이 출시한 신개념 스마트폰 아이폰은 모바일 혁명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반면 삼성은 2008년 금융위기와 특검사태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2010년 5월이 돼서야 비로소 모바일 혁명에 대응할 만한 스마트폰 갤럭시S가 등장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공포심 가질 필요없다. 기죽지 마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 취임후 삼성은 항상 변했고 변화 속에서 성공을 거둬왔다. 잘 나갈땐 반성하고 반성할 땐 가슴을 편다. 이후 갤럭시 시리즈는 삼성을 대표하는 전략 상품으로 거듭난다. 갤럭시S는 2000만 대, 갤럭시S2는 4000만대, 갤럭시S3는 6000만대...그야 말로 대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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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은 이건희 회장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킨 것이다. 변화의 이면에는 앞서 강조했듯이 ’위기감‘이 자리 잡고 있다. 돌이켜보면 공식 비공식 석상을 가리지 않고 이 회장은 꾸준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했다. 이 회장이 말하는 미래는 적어도 ’10년 후‘다.

10년 후 위기론은 이미 2002년부터 제기됐다. 그해 6월 용인에 있는 삼성 인력개발원에서는 사장단 회의가 열렸다. 디지털 사업의 중·장기 성장 전략을 토의하고 구체적 대비책을 마련하는 자리였다.

◆밤잠 설치는 의무감… “삼성 믿고 온 사람들 끝까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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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회의이 백미는 “5년 후 또는 10년 후에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는 이 회장의 발언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5~10년 뒤 무엇으로 세계 1위를 할 것인지에 대한 중·장기 전략과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 첨단 기술과 최고 인재를 조기에 확보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온갖 기술이 융합되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를 맞아 사업부 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2002년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소니를 추월한 기념비적 해다. 그러나 이 회장은 이에 관심조차 없었다. 언론에서 삼성전자가 소니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기사를 내자 “누가 이런 얘기를 언론에 떠들고 다니는가? 우리가 소니를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다”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이 회장의 위기의식이 잘 나타난 키워드는 ‘샌드위치론’이다. 2007년 1월 이 회장은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는 샌드위치 신세다.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고생해야 하는 위치”라고 경고했다. 2월 9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투명사회협약 대국민 보고대회’ 행사장에서 기자들에게 “삼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5~6년 뒤에는 큰 혼란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07년 한국은 처음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 달러를 넘으며 축배를 들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3년 한국의 1인당 GDP는 2만4000달러 수준을 기록해 20% 성장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매출은 63조 원에서 무려 네 배가량이나 폭증한다. 솔직히 최근 몇년간 한국 경제의 성장은 삼성 홀로 이끌어 왔다고 봐도 될 정도다.

본능적인 것일까. 이 회장은 늘 기회와 위기를 예민하게 포착하며 앞날을 설계하고 준비해 왔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고독한 싸움이었다. 노키아를 두려워하면서도 휴대전화 사업에 승부를 걸었다. 소니와 도시바의 힘을 알면서도 디지털 TV와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샌드위치 위기론’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남들 잘 시기에 밤잠을 설치는 중압감에 시달려 왔다. 어떻게 보면 이 회장은 지나칠 정도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대규모 인력을 뽑을 때마다 이 회장은 입버릇처럼 되뇐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나 그리고 삼성을 믿고 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2013년 4월 6일 김포공항. 87일간의 해외 일정을 마치고 기자들을 만난 이 회장의 소감에도 신경영 20년을 관통하는 위기감과 도전의식이 압축돼 있다. 언뜻 보면 대단할 것 없는 문구지만 하나하나의 단어를 뜯어보면 적지 않은 세월을 절치부심하며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살아왔던 한 기업인의 내적 고민이 녹아 있다. 그의 개혁 20년 소회다.

“이제 20년이 됐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더 열심히 뛰고 더 사물을 깊게 보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희 일대기]디지털 강자를 넘어 100년 기업으로
[한경비즈니스 이건희 회장 추모 특별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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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wlli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0호(2020.10.26 ~ 2020.11.0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