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고 이건희 회장의 경영 철학 [한경비즈니스 = 이홍표 기자] 기업이 성과를 내기 위해선 여러 가지 요소들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삼성은 소유 경영자를 주축으로 전략적 비전을 세우고 이에 근거해 전략을 비롯한 경영 요소들을 설계함으로써 삼성 고유의 경영 방식을 창출해 냈다.
고 이건희 회장은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질 경영을 기조로 삼고 시장 선도자 전략, 사업 구조 고도화 전략 등을 추진해 나갔다. 리더십과 지배 구조 측면에서는 각 계열사와 사업부마다 세계 1등 제품을 만들도록 독려하고 그렇지 못하면 망한다는 위기의식을 고취해 왔다. 또한 이 회장은 시장 선도자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요청되는 대규모의 기업가적 투자 의사 결정을 감당해 시장 선도자 전략의 실행을 도왔다.
조직 문화 측면에서 시장 선도자 전략을 지원한 것은 글로벌 제일주의, 핵심 인재 중심의 인재 제일주의였다. 핵심 인재 중심의 인재 제일주의는 ‘1만 명, 1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인재’를 중시해 이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도록 함으로써 시장 선도자 전략을 지원했다.
삼성이 지금과 같은 글로벌 강자로 자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이 회장의 취임과 1993년 신경영 혁신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삼성은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세계 일류 기업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삼성은 당시까지 한국에서만 일류 기업이었다. 이때 삼성 경영의 특징은 소유 경영자가 세부적인 의사 결정에까지 관여하는 가부장적 리더십과 수직적 계열화다. 하지만 이런 경영 방식으로는 이 회장이 제시한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비전을 성취할 수 없었다. 삼성은 1990년대에 신경영 혁신을 추진하고 경제 위기를 돌파하면서 기존 경영 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해 현재의 경영 시스템을 창출했다.
◆모든 제품에서 ‘세계 1등’을 추구하다
삼성이 성장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소유 경영자들의 뛰어난 리더십을 꼽을 수 있다. 선대 이병철 회장이 관리 중심의 경영 시스템을 구축해 삼성을 운영했다면 이 회장은 기업의 비전을 제시하고 인재와 기술을 중시하는 경영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삼성을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만들었다.
이 회장은 건전한 위기의식을 조성했다. 또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삼성이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소프트 경쟁력 강화,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한 기술 표준 선점, 디자인 역량과 브랜드 가치 강화, 창조 경영 등이 그것이다.
이 회장은 구체적인 전략적 의사 결정에 관여해 직접 결단을 내려 주는 일도 해 왔고 때로는 신경영 혁신 과정에서 보듯 직접 강연하면서 변화를 진두지휘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룹의 총수로서 각 계열사들을 통합하는 열정과 협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음은 물론이다.
이 회장 리더십의 특징은 삼성의 구성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감을 심어주는 ‘비전 리더십’이라는 점이다. 이 회장은 세계 1등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반도체·휴대전화·TV·노트북컴퓨터·프린터 등 삼성이 진출해 있는 거의 모든 전자 관련 제품 영역에서 세계 1등을 하도록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 회장이 제시하는 비전을 이른 시간 내에 성취하기 위해 임직원들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회 선점형의 공격적 투자, 위기의식과 긴장감, 기술과 핵심 인재 확보 중시, 역량과 성과에 대한 파격적인 인센티브, 조직 간 경쟁과 협력 등 오늘날 삼성식 경영의 특징적인 모습이 만들어졌다.
비전 리더십의 또 다른 측면은 건전한 위기의식 조성이다. 그는 열정을 다해 혁신하면 세계 1등 기업이 될 수 있지만 혁신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회사가 망할 것이라며 열정을 다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했다. 삼성이 창업 이후 최대 이익을 내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는 날에도 그는 “5년 후, 10년 후에 삼성이 무엇으로 먹고살지 생각만 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며 “5년 후, 10년 후 삼성의 1등 제품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선택과 집중’ 위한 상시적 구조 조정 이뤄
삼성의 의사 결정 시스템은 이 회장이 취임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가장 큰 변화는 소유 경영자 중심의 경영에서 소유 경영자와 전문 경영자의 역할 분담에 의한 공동 경영으로의 변화였다. 이병철 회장은 비서실(현 미래전략실)을 통해 계열사의 일상적인 의사 결정에까지 관여했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그룹이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고 나머지는 계열사의 전문 경영진에게 일임했다.
소유 경영자의 역할 변화에 따라 전문 경영자들의 역할도 크게 바뀌었다. 이병철 회장 당시의 전문 경영자는 회장이 지시한 사항을 집행하는 집행자·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에는 전문 경영인이 해당 사업의 전략까지 수립하는 전략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신경영 혁신 이전까지 삼성은 세심한 관리 중심의 기업이었다. 하지만 신경영 혁신을 통해 작은 관리에서 큰 관리로, 운영 효율성 중심의 경영에서 전략 중심의 경영으로 변신을 추구하면서 세심한 관리의 성격도 일부 수정됐다. 회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모두가 작은 것까지 챙기면 중요한 사업 기회를 놓칠 수 있고 현장의 자율·창의·도전의식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심한 관리 그 자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경영 혁신에서 강조하는 질 중심의 경영은 현장에서의 세심한 관리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상부 경영진에서는 큰 관리와 전략적 관리를, 하부 관리직과 현장에서는 더욱 강화된 세심한 관리를 하는 방식으로 분업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전략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통한 사업 구조 고도화 전략을 추구했다. 사업 구조 고도화를 위해선 양 중심의 관행들을 뜯어고치고 질과 수익성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최고경영자(CEO) 자신이 제국 건설의 꿈을 버리는 대신 실리 위주의 경영과 신규 사업을 추진하거나 투자 의사 결정을 할 때 수익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이 회장은 신경영 혁신을 추진하면서 ‘질 중시 경영’이라는 전략적 비전을 설정했다. 이것의 핵심은 ‘사람의 질을 높여 경영의 질을 높이고 높아진 경영의 질을 기반으로 제품과 서비스의 질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영 전략도 크게 수정됐다. 우선 기존의 ‘빠른 추종자’ 전략을 월드 퍼스트, 월드 베스트 제품을 통한 ‘시장 선도자’ 전략으로 수정한 것이다. 과거 삼성은 시장 선도적인 기업들의 제품을 신속히 모방해 낮은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시장점유율을 확대해 가는 빠른 추종자 전략을 활용했다. 그 결과 TV·반도체·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휴대전화 사업에서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 표준을 장악한 기업이 승자 독식을 통해 장기간 고이윤을 향유하고 빠른 추종자 전략이 탄탄한 수익 기반을 지속적으로 창출해 주지 못하면서 삼성은 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은 우선 기술 경로가 정해진 기존 제품에 대해서는 선행 기술 개발과 설비 투자로 격차를 더욱 벌려 나가는 ‘초격차 전략’을 사용했다. 즉 경쟁자보다 앞선 성능의 제품을 먼저 출시해 수익을 창출하고 후발 업체가 같은 성능의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하면 가격을 떨어뜨려 경쟁자가 가져갈 이익을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신경영 이후에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에 의거해 사업 구조를 질적으로 고도화하는 일을 활발히 추진했다. 경쟁력이나 성과가 없는 회사나 사업은 가차 없이 정리하는 대신 성과를 보이는 핵심 사업에 대해서는 그룹이나 계열사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 방향으로 선택과 집중을 보다 명확히 했다. 실제 삼성은 외환 위기 이후 매년 사업들의 경쟁력을 평가해 상시적인 사업 구조 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
[알림] 이건희 회장 추모 특별판 발행 한경비즈니스가 10월 25일 타계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추모하는 특별판을 제작했다. 이번 특별판은 국내 주간지에서 이제까지 볼 수 없던 파격적인 형식을 선택했다. 이 회장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글로만 엮었다. 변방에 머무르던 한국 기업을 세계 톱 대열로 끌어올린 비범한 경영자에게 바치는 작은 송가다. 이건희 회장 추모 특별판은 인터넷(https://bit.ly/3dZdoA7)에서 누구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1호(2020.10.31 ~ 2020.11.0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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