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Ⅰ]


-지난해 6월 ‘승지원 회동’이 터닝 포인트…‘협력 경영’·‘소통 경영’의 시작
이어지는 5대 그룹 회장들의 만남…'위기의 돌파구’ 되나
[한경비즈니스 = 이홍표 기자] 최근 국내 그룹 총수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또 총수들 간의 독대도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현안을 논의하는 한편 친목도 도모하고 있다. 총수들이 직접 나서면서 한국 대기업의 주요 사업부문에서도 협력이 공고해지고 있다.


지난 11월 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이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이들이 만난 곳은 SK그룹이 소유한 서울 광장동 워커힐 내 애스톤하우스. 이날 모임은 이들 중 가장 맏형인 최 회장이 주선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재계에 따르면 이날 회동에선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 것으로 파악된다. 먼저 참석자들은 부친상을 치른 이 부회장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업적을 기린 것으로 전해졌다.


또 지난 10월 회장에 취임한 정 회장에 대해서는 축하 인사 등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12월이면 환갑을 맞는 최 회장 등과 관련해서도 이야기가 오간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내년 초 임기가 끝나는 박용만 회장의 뒤를 이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날 회동에 대해 한 재계 인사는 “이재용 부회장과 최태원·정의선 회장은 서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개별적으로 종종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2018년 5월 LG그룹 구본무 회장, 2019년 4월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2020년 1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지난 10월 삼성 이건희 회장까지….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재계 거인들이 불과 수년 새 영면에 들었다.


신격호 회장을 비롯한 기업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창업가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어 이건희·정몽구·구본무로 대표되는 오너 2세들 또한 기업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켜 놓은 후 물러났다. 이들이 떠난 자리는 이제 3~4세가 이끌게 됐다. 이재용 부회장, 정의선 회장, 최태원 회장, 구광모 회장, 신동빈 회장이 대표 격이다. 한화·GS·LS·코오롱의 3~4세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영 환경은 만만치 않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전 세계적인 고민거리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총수들은 11월 만찬을 포함해 잇단 회동을 이어 가고 있다. 재계 현안을 논의하는 한편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즉 위기 극복 해결책으로 총수들끼리의 ‘협력’과 ‘소통’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한국 찾은 빈 살만 왕세자


재계에선 총수들의 회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계기를 지난해 6월 한국을 찾은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 왕세자와 5대 그룹 총수의 승지원(삼성그룹 영빈관) 회동이다. 이날 회동 이후 4대 그룹 혹은 5대 그룹 총수들의 회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당시 이들은 빈 살만 왕세자와의 만남 직후 이 부회장 자택에서 별도의 회동을 갖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승지원 회동으로 물꼬가 터지면서 재계 총수들이 본격적으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그는 “4대 그룹은 대외 활동을 할 때 여러 가지 조율할 것이 많다 보니 공식적으로 모이는 기회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알려진 것 외에 몇 번 더 만났을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며 “총수들이 구체적인 사업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서로 협력할 것은 협력하자는 공감대가 있기에 가능한 회동”이라고 분석했다.


승지원 회동은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회장, 최태원 회장, 구광모 회장, 신동빈 회장 등이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나 1시간 정도 다담(茶談)을 가진 자리다.


당시 오전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5대 그룹 회장 모두가 청와대에서 공식 행사를 열었다. 늦은 저녁 시간에 이들은 삼성의 영빈관인 한남동 승지원에서 ‘비공식적 만남’을 가졌다. 승지원은 고 이건희 회장이 집무실로도 활용하던 삼성그룹의 유서 깊은 곳이다.


이 부회장은 ‘석유 왕국’ 사우디를 탈석유·첨단산업 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구상을 가진 ‘최고 실세’ 빈 살만 왕세자와 한국 간판 기업 총수들의 승지원 만남을 주선했다. 이날 회동은 사우디의 요청에 이 부회장이 화답하면서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빈 살만 왕세자는 총수들과 만나 최근 글로벌 경제 현안 등과 관련해 의견을 교환하면서 사우디에 대한 투자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사우디 정부가 추진 중인 국가경제 개조 계획인 ‘비전 2030’을 위한 협력 방안 등에 대해서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동에는 사우디 경제부처 장관들도 배석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에 5000억 달러(약 580조원) 규모의 세계 최대 스마트 시티 조성 사업 ‘네옴(NEOM)’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인물이다. 앞서 빈 살만 왕세자는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에너지 등 83억 달러(약 10조원) 규모의 투자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어지는 5대 그룹 회장들의 만남…'위기의 돌파구’ 되나


과거는 전경련 중심의 회의 이뤄져


재계 3·4세 경영인들은 전 세대와 달리 어린 시절부터 자주 왕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젊은 총수들은 서로 무게를 잡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좋은 기회가 오면 큰 딜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물론 과거엔 공식적으로 총수들의 의견을 조율했던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있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 회의는 재계에서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였다.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내로라하는 대한민국 기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경제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직접 목소리를 냈다. 한국 재계의 큰 별이던 이병철 창업자가 첫 회장을 맡았고 정주영 창업자가 규모를 키운 전경련은 명실상부한 재계의 대표 단체였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정부가 주도한 ‘빅딜’ 과정에서 재계의 희비가 엇갈렸고 여기서부터 전경련의 위상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거치며 주요 그룹 총수들이 잇달아 전경련 탈퇴를 선언했다. 이후 재계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물론 직접 회동을 가지는 일도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승지원 회동 이후 총수 간 대화의 물꼬가 터지면서 재계 회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비록 멤버는 아직 재계 최상위권 총수들로 한정됐지만 이들 그룹은 한국 기업들의 리더 역할을 하는 기업들이다. 해당 그룹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상징성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 재계의 주요 방향이 이 모임에서 정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총수 모임이 소수 정예, 비공개로 이뤄진다는 점도 주목할 포인트다. 과거 전경련 회장단 회의는 공식 행사로 이뤄졌고 총리를 초청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일부는 비공개로 진행되기도 했지만 언론 취재가 허용되는 행사였다.


하지만 최근의 회동은 철저히 비공개로만 이뤄지고 있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계자 배석 없이 그룹 총수만 끼리만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 전경련 시절의 모임과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대내외적 불확실성 대응 등 단순한 친목 모임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워낙 소수만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새나갈 우려도 적다. 한 대기업 인사는 “재벌 총수들도 고민이 있을 텐데 그 고민을 누구와 나눌 수 있겠느냐. 결국 같은 총수들일 수밖에 없고 그들끼리 자주 만나며 가깝게 지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모임 주도하는 최태원과 정의선


현재 재계 모임을 주도하는 총수는 크게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최태원 회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의선 회장이다. 최 회장은 5대 그룹 회장 중 신동빈 회장에 이어 나이가 둘째지만 신 회장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셔틀 경영을 하는 만큼 자연스레 좌장 격이 됐다.


물론 최근 가장 활발한 행보를 하는 사람은 정의선 회장이다.


지난 11월 6일 정 회장은 롯데케미칼 첨단소재 의왕사업장을 방문해 신동빈 회장과 만났다. 롯데케미칼 의왕사업장은 자동차 내·외장재로 사용되는 고부가합성수지(ABS)·폴리프로필렌(PP)·폴리카보네이트(PC) 등 고기능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연구·개발(R&D)하고 있다. 두 총수는 의왕사업장에 있는 제품 전시관과 소재디자인연구센터 등을 둘러보면서 자동차 신소재 개발 분야에서의 협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신 회장과의 만남을 통해 올해 국내 5대 그룹 총수 모두와 회동을 가지는 기록을 남겼다. 정 회장은 지난 5월 이재용 부회장과 회동했고 이어 6월 구광모 회장, 7월 최태원 회장을 차례로 만났다. 삼성·LG·SK와의 만남에서는 전기차 배터리 분야의 협력 방안이 중점적으로 논의됐다.


총수 간 만남의 스타트는 5월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회장의 만남이다. 당시 이 부회장과 정 회장은 삼성SDI 천안 공장에서 전고체 개발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선행 개발 현장을 둘러봤다. 전고체 배터리는 기존 배터리보다 크기가 작고 안정성은 높아 전기차 산업의 ‘게임 체인저’로 불린다.


정의선 회장은 이어 구광모 회장과 6월 처음 단독 회동했다. 5월 이재용 부회장과 만난 데 이어 한 달 만에 구광모 회장을 찾은 것이다. 당장 사업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한국의 대표 완성차 브랜드와 배터리 기업이 ‘드림팀’을 구성을 준비하고 있다는 자체에 의미가 실렸다. 삼성과 LG는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 상위 5개 브랜드에 포함된 기업들이다.


정의선 회장은 7월에 최태원 회장을 만나며 마찬가지로 배터리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처럼 신속하게 이뤄진 정의선 회장의 행보는 현대차그룹·삼성SDI·LG화학·SK이노베이션 등 한국의 배터리 3사 간의 협업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각 사의 배터리 기술 경쟁력을 직접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 이재용 부회장 역시 7월 말 현대차 남양연구소를 찾아 정의선 회장을 만났다. 정의선 회장의 5월 삼성SDI 천안 공장을 방문에 대한 답방 차원이다. 현대차 남양연구소는 현대차 모빌리티 기술의 산실인 곳이다. 현대차에 따르면 둘은 이 자리에서 미래 자동차와 모빌리티 분야의 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총수들 간의 만남은 재계 안팎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의사 결정권을 가진 총수 간 회동으로 협업을 강화하면 발 빠르게 변하는 시장 트렌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각국이 경기 불황 방어와 탄소 저감을 위해 그린 뉴딜을 정책적으로 추진하면서 현대차는 다른 기업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발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차세대 배터리가 이를 위한 해법으로 미리 거래처를 확보해 놓으면 각국의 그린 뉴딜 정책으로 발생할 수 있는 배터리 공급 부족 사태도 비켜 갈 수 있다.


특히 그룹 총수의 모임이 보다 큰 그림에서 그룹 경영 활동에 도움이 될 것이란 시각도 많다. 최근 들어 국내 경영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또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국내 기업인으로서 공동 대응하고 논의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기업별로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의견을 모아 의견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도 해당 모임의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조직 문화를 혁신하고 유연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진 만큼 수장이 젊어지는 건 세계적인 추세”라며 “젊은 총수들은 디지털·모바일을 이용한 혁신 경영에 속도를 내고 서로 간 경쟁과 협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경영 환경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관계자는 “4대 그룹 총수들이 지난 9월에도 회동하는 등 그간 한두 달에 한 번꼴로 비공식 모임을 가져 왔다. 그룹 간 사업 협력이나 위기 대응 공동 모색 등의 방안이 가시화될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hawlli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6호(2020.12.07 ~ 2020.12.1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