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폴리틱스]
-일본 수출 규제로 주목받는 화관법·화평법…업계 “망국법 개정해야”에 與 “개정은 없다”
배관 검사 받으려면 14개월 ‘셧다운’ 떨고 있는 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
[한경비즈니스=홍영식 대기자]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과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화평법)’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12년이다.

둘 다 산업 현장의 안전을 이유로 업계의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법안이 마련됐고 속전속결로 국회에서 통과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화관법은 화학물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취급 기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2012년 경북 구미공단에서 발생한 불산 가스 누출 사고가 계기가 됐다.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을 전면 개정해 사실상 새 법이 나왔다. 의원입법 형태로 국회에서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뒤 국회 본회의 처리까지 32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불산 가스 누출에 대한 악화된 여론 때문이었다.

2015년 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유해물질 취급 시설 충족 기준 항목이 79개에서 413개로 다섯 배 이상 늘었다. 사고를 낸 사업장에 대해 매출의 5%까지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특히 법 시행 전인 2014년 12월 31일 이전에 가동에 들어간 시설도 2020년부터 저압 가스 배관 검사를 받도록 소급 적용한 것이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은 고압 독성 가스 배관만 안전 검사를 받고 있다. 압력이 낮은 가스관에서는 독성 가스가 샐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법 시행 후 새로 짓는 공장은 비용이 더 들더라도 처음부터 기준에 맞춰 설계하면 된다. 문제는 기존 공장이 새 기준에 맞춰 저압 가스 배관 검사를 받으려면 공장 전체를 멈춰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 수출의 25%를 담당하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업계가 떨고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 특성상 하나의 라인으로 배관이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업계 시뮬레이션 결과 배관 검사를 받고 라인을 정상적으로 재가동하는 데 14개월 정도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손실이 수조원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업계에서 “화관법 취지는 좋지만 현실적으로 무리한 조항”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공장을 처음 세울 때 당시 법과 시행 규칙에 따라 설비를 만들었는데 새 기준을 다시 적용해 공장을 1년 이상 세워 둬야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배관 검사 받으려면 14개월 ‘셧다운’ 떨고 있는 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

◆ 내년부터 기존 공장도 적용·등록물질 방대 기업 “큰 부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 가동이 화관법 적용으로 멈추면 후발 주자인 중국에 따라잡힐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내세워 대규모 예산을 들여 관련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화평법 제정 계기가 된 것은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다. 가습기 살균제에 포함된 유독 물질인 메틸클로로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등을 초미세입자 형태로 흡입한 것이 사망 사건의 원인이라는 진단이 나오자 법안 제정 필요성이 대두됐다.

2012년 법안이 마련됐고 이듬해 5월 국회를 통과했다. 시행에 들어간 것은 2015년부터다. 기업이 신규 화학물질을 연간 100kg 이상, 기존 물질을 연간 1톤 이상 제조·수입·판매할 때 환경부에 등록하도록 한 게 이 법의 핵심이다.

이에 따라 2030년까지 등록 대상 물질이 510종에서 7000여 종으로 대폭 늘어난다. 신고 의무 유해 우려 물질도 800여 종에서 1300여 종으로 확대됐다. 등록 의무 위반에 대해선 매출의 5%까지 과징금을 물리기로 했다.

문제는 등록비가 기업들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 민감한 영업 비밀까지 새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은 유해 화학물질을 등록하려면 정부 지정 시험 기관에서 받은 폭발성·유독성·산화성 등 수십 가지 항목에 대한 시험 자료를 갖춰야 한다.

서류 작업에만 8~11개월이 걸리는 실정이다. 수입 업체는 해당 물질을 생산한 해외 기업에서 관련 자료를 받아 국내 시험 기관에서 인증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물질이 유해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기업은 해당 화학물질을 사용할 수 없고 대체 물질을 찾아야 한다.

등록 대상이 방대하다 보니 유해물질을 일일이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일부 정보는 해외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한다. 하지만 외국 제조사는 자료가 광범위한데다 영업 기밀을 이유로 정보를 넘겨주지 않는 곳도 많다.

화학물질 자료를 준비하고 등록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다보니 경영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우려다. 1개 화학물질당 1000여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 넘게 비용이 들어간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들은 폐업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하소연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 A기업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5억원이었는데 화학물질 11종 등록비용으로 6억원을 썼다.

한국의 화관법과 화평법 규제는 주요 선진국들보다 더 엄격하다. 지난 8월 12일 한국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곽노성 한양대 특임교수는 “화학물질 평가 규제 강도는 일본·미국·유럽연합(EU)·한국 순”이라고 지적했다.

곽 교수는 “일본과 미국은 신규 물질만 신고하지만 한국 화평법은 기존 물질까지 모두 신고하도록 한다”며 “일본에 비해 한국의 관리 대상 화학물질이 약 3.5배 많다”고 했다. 사업장마다 최소 수십억원씩 시설 개선비용이 들다 보니 소재 국산화를 포기하고 수입 쪽으로 방향을 바꾼 기업들도 적지 않다.
배관 검사 받으려면 14개월 ‘셧다운’ 떨고 있는 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
◆ 與 “법 개정 없이 시행령 고쳐 등록절차 간소화”…미봉에 그쳐

화관법과 화평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산업계의 줄기찬 요구에 대해 꿈쩍도 하지 않던 정부가 규제 완화 검토에 나선 것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때문이었다. 화관법과 화평법 등 환경 규제가 핵심 부품·소재의 국산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8월 5일 내놓은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대책’에는 수출 규제 대응 물질 취급 시설 인허가 및 기존 사업장 영업허가 변경 신청 절차를 수개월에서 30일로 단축하는 방안 등이 담겼다.

화학물질 생산 공장을 신설·증설할 땐 장외영향평가서·위해관리계획서 작성, 적합성 평가, 영업허가 신청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화학물질 안전관리계획서 처리도 5~14일에서 하루로 단축하기로 했다.

또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타격을 입은 159개 품목에 대한 수입·조달에 민원이 제기되면 인력을 배치해 신속하게 해결한다는 방침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의 대책이 ‘미봉’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부와 여당은 화관법과 화평법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시행령 규정 등을 고쳐 기업의 어려움을 덜어주겠다는 것이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8월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국민 생명·안전에 관련된 현행법의 골간을 유지하되 필요하다면 한시적·임시적으로 규제를 완화한다는 것이지 생명·안전 관련 기존 법의 근간을 흔드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등록 의무를 간소화하고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는 것만으로는 기업의 부담을 더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법 개정을 통해 장기간 공장 ‘셧다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과도한 화학물질 등록 대상을 줄이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관법과 화평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는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은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정부가 내놓은 화학물질 취급 시설 등 각종 인허가와 심사 기간 단축 조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신 의원의 개정안에는 연구·개발 과정에서 신규 물질 증명 테스트나 독성 평가 등에서 불필요한 심사를 줄이는 내용 등이 담길 예정이다.

신 의원은 “신규 물질 증명 테스트와 독성 평가 등 실제 심사 내용에 대한 개선 없이 심사 기간만 단축하는 것은 인력과 비용만 더 늘릴 수 있다”며 “현장의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게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말했다.

국회에는 화관법 22건, 화평법 19건이 발의돼 있다. 하지만 법 개정을 통한 규제 완화가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환경 규제가 소재·부품 기업의 연구·개발에 걸림돌이라는 데는 여야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지만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법 자체는 손질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방침을 보이는 데다 일부 환경 관련 시민단체들이 법 개정에 대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4호(2019.09.30 ~ 2019.10.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