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독일)=박진영 유럽 통신원] 지난 1월 말 라이프치히의 한 거리에 소란이 일었다. 이날 새로 오픈하는 저가 할인 마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매장 안에는 이미 사람이 가득했고 매장 밖에도 대기 행렬이 넘쳐났다. 러시아의 거대 소매업체 토르그서비스(Torgservis)가 처음 독일에 진출하면서 빚어낸 이날 광경은 라이프치히뿐만 아니라 전 독일 내에서 뉴스거리가 됐다.
이 회사의 할인 브랜드인 메레(Mere)는 문을 연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전 품목이 매진돼 마트는 이틀 동안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 한바탕 소란으로 시작된 메레의 오픈 이슈가 그렇게 끝난 후 어떤 고객은 돌아오지 않았고 어떤 고객은 단골손님이 됐다. 독일에 진출한 러시아의 할인 마트 메레는 더 값싼 가격에 독일을 정복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라이프치히에 첫 오픈, 매진으로 이틀간 문 닫기도
메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무 팰릿 위에 놓인 판지 상자들이 눈에 띈다. 메레가 슈퍼마켓이라기보다 창고처럼 보이는 이유다. 사실 독일의 많은 마트들이 그런 방식으로 시작했는데 일부 고객들이 메레 매장을 보고 알디(Aldi)의 예전 모습을 떠올린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상자 안에는 체코산 과일 주스 등이 들어 있고 냉장고 안에도 헝가리산 소시지 등이 채워져 있다. 가격 경쟁력이 있는 제품들로 채운 덕에 메레에서 파는 식료품이나 비식료품 등은 독일의 대표 저가형 마트인 알디나 리들(Lidl)보다 20% 정도 싸다. 하지만 독일 경쟁사들이 전국에 수천 개의 점포를 갖고 있는 반면 메레는 이제 딱 한 개의 점포만 오픈했을 뿐이다.
물건을 싸게 구매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은 메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이들에게는 알디나 리들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기존에 선호하는 브랜드 마트가 있는 고객들조차 “1주일 내내 메레에서 쇼핑할 수는 없겠지만 고기·소시지·통조림 등 몇 가지 품목을 더 싼값에 살 수 있어 만족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메레의 오너사인 토르그서비스는 시베리아의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본사를 두고 있다. 교통신호등을 뜻하는 러시아어 ‘스베토포(Svetofor)’라는 브랜드로 800개 이상의 마트를 보유하고 있고 대부분이 러시아의 작은 마을과 도시 그리고 벨라루스·중국·카자흐스탄 등의 나라에도 지점을 두고 있다. 대폭 할인을 내세운 저가 마트 사업 모델은 주로 지난 몇 년간 이어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에는 그 지점들이 서쪽 나라들로 확장되는 추세다. 메레라는 브랜드 이름은 루마니아에서 매장을 오픈할 때 처음 사용했고 2017년 독일에 건너와 자회사인 TS마크트를 설립했다. 하지만 토르그서비스의 전략이 그렇듯 TS마크트 역시 광고나 마케팅에 관심이 없고 투자도 거의 하지 않는 분위기다. 라이프치히의 매장 오픈 당시 광고 등을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TS마크트 관계자는 독일 언론에 “우리는 광고에 관심이 없고 언론을 초대하지도 않았으며 가능한 한 조용히 시작하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고객의 줄 서기 덕분에 제대로 떠들썩한 오픈 광고를 한 셈이나 다름없으니 이 전략이 잘 통했다고 할 수 있다.
라이프치히의 첫 매장이 순항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TS마크트 측은 이미 지점 확장을 고려하고 있다. 이 회사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독일 동부 주 중에서 최소한 8만 명 이상의 거주자가 있는 도시를 대상으로 다른 지점들을 물색 중이다.
츠비카우(Zwickau)와 켐니츠(Chemnitz) 지점은 이미 예정돼 있고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작센-안할트 주, 튀링겐 주, 브란덴부르크 주와 베를린 내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는 중이다.
메레가 독일 내에서도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독일에는 여전히 서독과 동독 사이에 큰 소득 차이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저가형 마트 선호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내에는 이미 경쟁력 있는 저가형 마트가 넘치고 넘치는 상황이라 메레의 성공 여부는 확언하기 어렵다. 쾰른의 EHI리테일 연구소 미카엘 게를링 이사는 “할인 업체들이 독일처럼 무려 40%에 달하는 큰 시장점유율을 갖고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독일은 저가 슈퍼마켓 사업 모델 수출에도 큰 성공을 거두고 있을 정도다. 이미 스위스·스페인·아일랜드 등 유럽 주요국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는 독일의 저가형 마트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던 영국 내에서조차 최근 들어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저가 공식에서 탈피, 마트와 경쟁하며 시장점유율 되찾아
마트들이 고객에게 낮은 가격을 약속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직원 비용과 임대료를 절약하고 한정된 품목을 제공하는 것이다. 일반 마트는 보통 슈퍼마켓의 5배에 달하는 평균 2000개에서 2500개의 품목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저가 마트 역시 값싼 가격을 위한 ‘공식’에 따라야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경쟁사들 역시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며 가격 경쟁률을 높이는 데 주력하면서 저가 마트의 가격 이점은 미미한 수준이 됐다. “결국 고객들은 왜 여전히 저가 마트에 가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저가 마트들은 전략을 바꿔야만 했다”고 게를링 이사는 말했다.
저가 마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싸다’는 방식에서 벗어났다. 조명과 디자인에 더 많은 돈을 쓰고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더 많은 브랜드를 비축하고 심지어 빵집을 매장 안에 두기까지 했다. 그 덕분에 그들은 시장점유율을 되찾았지만 동시에 다른 저가 마트 브랜드들에 ‘독일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시장’이라는 인식을 심어 줬다. 러시아의 메레가 독일 땅에 진출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독일 고객들의 소비 패턴도 달라졌다. 많은 이들이 단순히 싸다는 이유로 ‘오늘의 특가’ 같은 상품에 열을 올리지 않고 필요한 물건만 사기 위해 마트에 간다. 값싼 가격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에서 이기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알디나 리들과 같은 독일 내 다른 저가 마트들은 아직 메레를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하지 않는 분위기다. 리들과 카우프란트를 소유하고 있는 슈바르츠 그뤠페의 클라우스 게릭 대표가 새로운 저가 마트는 회사의 이직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고 러시아 경쟁 업체의 빠른 소멸을 예견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게를링 이사는 “알디와 리들이 라이프치히 소비자들의 패턴과 발전 정도를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며 “만약 그들이 메레가 자신들의 고객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특정 제품의 가격을 낮추는 정책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3호(2019.05.06 ~ 2019.05.1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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