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결혼 초상화’ 한 쌍…총리·대통령까지 나서 극적 타협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치열한 입찰 경쟁 끝에 렘브란트의 희귀 작품 한 쌍을 1억6000만 유로(2056억 원)에 공동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두 나라가 개인 소장 예술품을 얻기 위해 협력한 것은 미술 시장에서 이례적인 일이어서 상당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예트 부스마커 네덜란드 문화부 장관이 지난 9월 30일 의회에 제출한 서면 보고서에 따르면 두 나라는 세계적 금융 부호 로스차일드 가문이 갖고 있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 렘브란트의 ‘결혼 초상화’ 한 쌍에 대해 각각 8000만 유로(1028억 원)를 지불하고 함께 소유권을 갖기로 했다. 해당 작품은 향후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교대로 전시되며 언제나 쌍으로 관람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유럽 내에서도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네덜란드와 프랑스 양국을 링 위에 올려놓은 렘브란트의 작품은 마르텐 술만과 그의 약혼녀 오피엔 코핏의 전신 초상화 두 점으로, 1643년 이들 커플의 결혼식을 기념해 그려졌다. 그림 속의 부유한 네덜란드인 부부는 당시 매우 유행하던 검은색 계열의 의복을 입었고 술만은 왼손에 장갑을, 코핏은 타조 깃털로 만들어진 부채를 들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내놓은 걸작
이 회화는 이른바 네덜란드의 황금기로 불리는 17세기 무렵 암스테르담 부유층의 스타일을 섬세하게 표현해 미술사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나아가 렘브란트의 작품 중 드물게 몸 전체를 표현한 초상화라는 점, 렘브란트의 대표작들이 대개 미술관의 소유인데 비해 개인이 오랫동안 보유해 대중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주요 기관과 미술 컬렉터들 사이에서 소장 및 투자 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거론돼 왔다.
남녀가 따로 그려졌지만 두 그림이 언제나 하나의 단위로 소개되고 있는 이 작품은 과거 네덜란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877년 암스테르담의 반 룬 가문이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에 이를 판매하면서 본토를 떠나게 됐다.
그러다 2013년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 작품을 판매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의사를 밝히면서 네덜란드 정부가 거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현 소유주로 명품 와인 샤토 라피트 로스차일드 회장이자 로스차일드은행 부회장인 에릭 드 로스차일드가 이 작품을 팔겠다고 했을 때 프랑스 내에선 국부 유출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왔지만 올 초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의 수출을 허용했다. 프랑스의 법에 따르면 중요한 예술 작품은 해외 판매 시 정부의 허가가 수반돼야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갖고 있던 138년 동안 1956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전시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없는 렘브란트의 ‘결혼 초상화’가 거래 시장에 나오자 네덜란드 정부는 바삐 움직였다. 네덜란드는 작품의 전체 가격인 1억6000만 유로 가운데 절반은 국가가 부담하고 절반은 국립 미술관의 재정으로 두 점 모두를 사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암스테르담·루브르 박물관에 교대로 전시
인수전 당시 타코 디보트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전시 담당 이사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렘브란트의 작품은 거래 시장에 거의 나오지 않는 만큼 이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렘브란트의 작품은 1961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230만 달러(26억 원)에 구입한 것이 미술관을 통한 마지막 거래로 기록될 정도로 시장에서 희소성이 높다.
이처럼 네덜란드 정부가 작품 전체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프랑스도 인수전에 뛰어들었고 수개월 간의 팽팽한 접전 끝에 두 나라는 해당 작품을 함께 인수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참석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열띤 회의를 거쳐 공동 소유에 최종 합의했다.
양국 정상은 렘브란트의 작품이 미술 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하는 중국이나 오일 머니를 내세운 중동 국가에 넘어가는 것보다 두 나라의 양보를 통해 유럽권에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양국의 문화 정책 결정자들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정부의 보호 하에 해당 작품이 대중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공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빔 파에보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이사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같은 협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두 점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미술관이 함께 관리하게 될 것”이라며 공동 소유 결정을 환영했다. 그는 또한 두 나라가 개인 컬렉션을 얻기 위해 협력한 것은 미술관 거래의 세계에서 상당히 신선한 개념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인수전에 참여한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문화부 장관도 “공동 인수는 혁신적인 해결책으로, 이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의 문화적 협력을 강화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문화부 대변인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는 그림 인수 가격인 8000만 유로 가운데 3000만 유로는 문화유산 기금에서 조달하고 5000만 유로는 철도 등 국영기업의 국고 배당금으로 충당한다는 계획이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중앙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 입찰 전쟁에 대해 비난 의견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두 나라의 정치가들과 미술 거래 전문가들은 양국이 소유권을 놓고 경쟁하면서 더 저렴하게 인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네덜란드의 일부 의원들은 작품 한 점을 사기 위해 쓰는 돈이 워낙 고가인 만큼 차라리 미술품 매입에 배당된 예산을 다른 곳에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네덜란드는 1998년 미국의 유명 아트 컬렉터이자 사업가인 새뮤얼 어빙 뉴 하우스로부터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의 ‘빅토리 부기우기’를 5000만 유로(642억 원)에 구입했는데, 당시 정부의 지출이 과도했다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나아가 아트 테크 열풍으로 거품이 잔뜩 낀 미술품 거래 시장의 과열 양상을 공공 미술관이 부추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헤이그(네덜란드) = 김민주 객원기자 vitamj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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