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세계 7위 등극 후 내리막길, ‘스마트폰 전문 기업’ 마지막 변신

‘벤처 신화’ 팬택이 5월 26일 기업 회생 절차 포기를 선언했다. 적합한 인수 대상자를 찾지 못해 더는 기업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법원이 기업 회생 절차의 폐지신청을 받아들이면 청산 절차에 돌입, 팬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지금 팬택은 멈춰 서지만 우리의 창의와 열정은 멈추지 않습니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팬택 직원 1200여 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한 신문 광고가 눈길을 끌고 있다. 파산을 앞둔 직원들의 작별 인사에 뒤늦은(?) 응원의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팬택은 어떤 회사였을까. 팬택의 가치는 무엇일까. 팬택의 24년을 되짚어 본다.


큐리텔·스카이 인수하며 덩치 키워
팬택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1991년 무선호출기(삐삐)를 제조하는 작은 벤처기업으로 출발했다. 직원은 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팬택은 창업 10년 만에 직원 2000여 명, 연매출 1조 원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이후 창업해 조 단위 매출 기업으로 성장한 유일한 제조업체로, 이 같은 팬택의 성장 속도는 대기업 삼성전자조차 창업(1969년) 15년 만에 매출 1조 원을 달성한 점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수준이다.

여기에는 팬택의 탁월한 기술력이 한몫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사실 팬택은 기술을 중시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매년 매출액의 10% 이상을 연구·개발(R&D)비에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기술 투자로 기술력을 키웠다. 2014년 기준 등록 특허는 4073건, 출원 특허는 1만4798건에 달한다.
‘삐삐’회사로 출발…매년 56% ‘초고속 성장’
1992년 무선호출기 생산·판매로 빠르게 성장한 팬택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1997년 과감한 체질 변화를 시도했다. 미래 이동통신의 신성장 산업으로 도약할 전망인 휴대전화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이러한 팬택의 도전 정신과 공격적인 경영은 1998년 모토로라와 1500만 달러 외자 유치 및 전략적 제휴 계약 성공으로 이어졌다. 당시 모토로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팬택의 인수를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역으로 모토로라의 투자를 이끌어 낸 것이다. 이에 따라 팬택은 연간 3억 달러어치의 단말기를 수출할 수 있는 길을 보장 받고 팬택의 기술력을 해외시장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이후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글로벌 기업으로서 초석을 다진 팬택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해 2001년 당시 매출 규모 1조 원에 달하는 현대큐리텔을 가족으로 맞이했다. 현대큐리텔 인수를 통해 팬택은 R&D 인력 650명 확보, 연간 40개 이상의 독자 모델 개발, 생산 대수 1200만 대 이상, 달러 매출액 기준 50대 기업의 거대 단말기 업체로 변신했다. 이는 미국 오디오박스와 2002년 약 1조 원에 달하는 휴대전화 500만 대 수출 계약을 성사시키는 시너지 효과도 가져왔다. 당시 휴대전화 수출 사상 세계 최대 규모였다.

글로벌 시장에서 인프라 구축에 성공한 팬택은 내수 시장 브랜드(큐리텔) 마케팅에 돌입하면서 국내 대기업들과의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했다. 전국 규모의 애프터서비스망 구축과 최고 품질의 휴대전화를 적정한 가격에 공급하겠다는 전략으로 소비자를 공략했다. 국내 최초 33만 화소 카메라 폰, 위치 추적 기능을 갖춘 GPS 폰 등을 잇달아 선보이며 국내 진출 3개월 만에 ‘빅 3’ 자리를 확고히 구축했다.
‘삐삐’회사로 출발…매년 56% ‘초고속 성장’
팬택은 2005년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진다. 프리미엄 브랜드 ‘스카이’를 인수하며 당시 ‘큐리텔’이 갖고 있던 친근한 이미지에 ‘스카이’의 고급 이미지를 조화시켰다. 인수 이후 연간 120만 대 생산 제한에서 풀리게 된 스카이는 시장 확대를 모색했고 팬택은 내수 2위의 메이저 플레이어, 프리미엄 휴대전화 시장의 강자로 입지를 굳건히 했다. 팬택이 매출 3조 원, 종업원 수 4500여 명(연구 인력 2500여 명)의 초대형 기업으로 성장한 것도 이 시점이다.

글로벌 시장 공략에도 거침이 없었다. 팬택은 2005년 국내 휴대전화 제조사 최초로 일본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일본 휴대전화 시장에 여타 외국 기업이 진출한 예는 전무후무한 상황이었다. 일본에서 외국 기업 최초로 밀리언 셀러에 등극됐고 2008년까지 2번의 밀리언 셀러 폰을 탄생시키는 진기록도 세웠다.

팬택은 창업 이후 15년 동안 연평균 성장률 56%에 육박하며 ‘벤처 신화’를 만들었다. 2003년 2조 원, 2005년 3조 원의 매출을 돌파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 간 팬택은 2005년 전 세계 휴대전화 업계 7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팬택에도 시련이 찾아왔다. 2006년 일명 ‘모토로라 레이저 쓰나미’ 여파로 매출이 부진해지며 이듬해인 2007년 4월 워크아웃을 신청한 것이다. 하지만 팬택의 가치는 위기 속에서 더욱 부각됐다. 팬택은 강점을 가진 시장을 선택하고 모든 재원을 집중해 역량을 극대화하는 이른바 ‘픽스 앤드 맥스(Fix & Max)’ 전략을 통해 기업 개선 작업에 들어간 2007년 3분기 이후 2009년 4분기까지 10분기 연속 영업 흑자를 달성했다. 이와 관련해 팬택의 한 직원은 “집요함과 열의·열정으로 대변되는 팬택 고유의 DNA를 동반한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고 설명했다.


LG전자 제치고 국내 2위 오르기도
이후 2010년 팬택은 국내 최초 안드로이드 OS 스마트폰인 ‘시리우스’를 포함해 스마트폰 7개 모델(시리우스·이자르·미라크·베가·베가엑스 등)을 출시하며 스마트폰 돌풍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특히 2010년 선보인 스마트폰 전 모델이 판매에 성공(국내에서만 약 100만 대 판매)하며 삼성전자에 이어 국내 휴대전화 제조사 2위 자리에 올랐다. 기업 개선 작업 이후 2010년까지 팬택의 누적 매출은 7조2000억 원, 누적 영업이익은 5111억 원을 기록했다.

스마트폰 전문 기업으로 탈바꿈에 성공한 팬택은 2011년 국내시장에서 프리미엄 스마트폰만 공급했다. 2011년 5월 세계 최초로 퀄컴 1.5GHz 듀얼 코어 프로세서를 탑재한 베가레이서를 이동통신 3사에 모두 공급하며 제품 경쟁력을 입증, 누적 판매량 200만 대를 달성했다. 팬택은 2011년 12월 마침내 기업 개선 작업을 종료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통신 기술 발달로 신규 모델의 출시 주기가 단축되고 고사양화되면서 제조사 운영비용이 크게 증가했다. 기술과 혁신 제품 위주의 경쟁에서 자금력과 브랜드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휴대전화 시장의 흐름에 이제 막 전열을 재정비한 팬택이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경쟁사의 마케팅 공세에 적기 대응하지 못한 팬택은 2012년 3분기부터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2014년 3월 둘째 워크아웃을 개시하고 8월 기업 회생 절차를 신청한 팬택은 결국 회생을 포기했다.

영욕의 팬택 24년사에 조소와 비난보다 애잔한 박수가 이어지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벤처기업으로 시작해 삼성전자·LG전자 등 굴지의 대기업과 경쟁하며 24년 간 경쟁 구도를 유지해 준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며 “앞으로 국내 제조 3사의 경쟁 구도가 붕괴되면 특정 제조사의 시장 독과점이 고착화돼 제품 및 서비스 경쟁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병화 기자 kb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