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자 극복이다”
씩씩하고 굳센 기운을 용기라고 부른다. 두려움 없이 의연하고 불의에 분연히 맞서 싸울 때 우리는 용기를 본다.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용기에 흔히 갖는 생각의 허점들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라케스와 네케아스가 ‘젊은이들에게 창술을 가르치는 게 과연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 토론에 소크라테스가 끼어들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왜 창술 교육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지 묻는다. 두 사람은 용기란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과연 그것이 참된 용기인지 되묻는다. 상황과 처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칼을 빼들고 ‘돌격 앞으로’의 행위가 과연 용기일까. 그 판단은 자칫 상황을 악화시키고 나아가 국가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참된 용기가 아니다.분별하는 지혜에서 참된 용기가 비롯돼
‘프로타고라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프로타고라스도 밀리지 않는다. 용기 있는 사람이 대담한 사람이라는 주장과 대담한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주장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는 앎이 대담함을 증진시킨다는 것으로부터 앎이 용기를 증진시킨다는 결론이 당연히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때는 추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추한 대담함에 대담하게 굴지 않는다.”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부끄럽고 추한 일을 꺼려 멀리 하고 그런 일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덤벼들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아름다운 용기가 필요한 일에 대담함을 보이는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무서워해야 할 것과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에서 참된 용기가 비롯되는 것이다. 플라톤도 이 대화를 통해 진정한 앎이 없이 대담한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니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가장 비겁한 사람은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자가 된다. 법과 정의와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정작 불의와 불법의 자행을 모른 척하고 독재와 반민주적 작태를 부추기는 자들이야말로 비겁한 사람들이다. 곡학아세를 일삼거나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셈하여 여론을 조작하는 자들이야말로 야비하고 비겁하다. 비겁한 자들이 지식만 채우고 그것을 권력 삼아 득세하는 사회는 불의하고 비겁한 세상이다.
영국의 국립묘지에는 소위 계급의 귀족 자제 무덤이 가장 많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 자제들이 앞다퉈 입대해 장교로 임관해 전장에 나가 용감하게 앞장서다 적의 저격으로 제일 먼저 죽거나 후퇴할 때도 끝까지 사수하면서 마지막에 퇴각하는 모범을 보이려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은 배가 침몰할 때도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가장 나중에 배를 버리는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를 스스로 지키는 이러한 전통이 그들의 귀족 제도를 버텨 낸 바탕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권력과 부와 명예와 쾌락을 소유한 자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 군에 보내지 않고 가능한 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들의 권리만 극대화하려는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노블레스 노(no)-오블리주’뿐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때로 용기는 정복자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한다”고 했고 공자는 “의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음이다(見義不爲無勇也)”라고 했다. 그러나 먼저 새겨야 할 말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자 극복이다.”
흔히 용기의 반대말을 비겁이라고 여긴다. 비열하고 겁이 많은 것을 우리는 비겁이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을 논했다. 중용은 모자람도 치우침도 없는 상태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 상태다. 중용의 관점에서 볼 때 비겁은 용기가 부족하고 결여된 상태다. 그런 점에서 비겁은 용기의 반대말이 아니라 만용의 반대말이다. 비겁함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그 내용이 비열한 것을 지칭한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과는 다르다.
올바른 두려움을 아는 것이 용기의 시작이다
두려움과 비겁은 다르다. 정조는 두려움을 알아야 크게 실수하지 않는다고 했다. ‘두려움을 아는 것’이란 스스로 정한 약속을 파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조절해 그것을 지켜 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오랫동안의 세손 생활을 통해 대부분이 긴장하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아니 어쩌면 너무 긴장하며 살았기 때문에) 늘 긴장하며 살 수 없어 스스로 정한 규율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며 두려움을 알며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곳에 자기 관리가 될 수 있는 문구를 걸어 놓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려움은 삶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이 두려움을 모른다면 제명을 다 누릴 수 없을 것이다. 통증이 없다면 몸을 마구 다뤄 온갖 병에 노출돼 결국 몸을 망가뜨려 죽게 되는 것처럼 두려움이 없다면 인간은 해서는 안 될 위험조차 인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다한 두려움은 어떠한 일도 자신 있게 할 수 없게 하거나 비겁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두려움을 통제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인간의 두려움의 원천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날 수 있다는 이 근원적 두려움은 때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악용하면 인간을 가장 비열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치 독일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악용했다.
앞서 정조의 두려움에 대해 말할 때 이미 언급한 것처럼 두려움이 부정적인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용기가 생명을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갈 수 있듯이 두려움이 때로는 생명을 지켜 줄 때도 있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그의 말은 꼭 생명의 보존에만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불의의 편에 서서 일하면서도 양심의 불꽃을 완전히 꺼뜨리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물론 때로는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이 불의가 아니라 정의로운 일이라고 착각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녔다면 가책을 느끼거나 향후 역사의 심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불의의 편에 서서 정의를 압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모습이 앞으로 어떻게 평가받을지 두려워한다면 뻔뻔하게 그 일을 계속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두려움은 그의 인격을 최후의 순간에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일 수 있다.
고든 리빙스턴은 ‘바보들은 꿋꿋하게 어리석음을 추구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사람들을 고문하면서까지 인간의 권리를 유보하는 것은 최근의 현상입니다. 참혹한 국가적 재앙을 겪은 후 그 두려움 때문에 생긴 현상이지요. 두려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은 겁을 먹은 유권자들의 두려움을 더욱 부추깁니다.”
두려움의 경건성을 박탈하고 타락한 두려움을 악용하는 자들에게 무릎 꿇지 않기 위해서라도 두려움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거짓되고 두려움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자는 두려움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다. 또한 우리 안에 그 두려움을 엉뚱하게 각색하는 본성이 숨어 있다는 것도 직시해야 한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얘기할 때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지만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처럼 파괴하는 자를 얘기할 때는 열광적인 흠모를 보인다”는 칼릴 지브란의 지적은 바로 그런 허점을 매섭게 꼬집은 말이다. 두려움을 어떻게 인식하고 조절하느냐에 따라 겸손하고 진지하게 살지 혹은 불의에 굴복하며 비겁하게 살지가 결정된다. 용기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마침내 내 안에 굴복하지 않는 여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두려움의 실체를 알아야 굴복하지 않는 의지가 움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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