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스·버냉키 블로그서 자존심 건 설전…‘구조적 장기 침체’ 논란

양적 완화는 ‘마약’ 같은 악습?
경제 이론을 조금만 접해 본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두 학자 간의 논쟁이 미국 학계와 월가에서 연일 화제를 뿌리고 있다. 미국 경제 진단과 정책 처방을 놓고 벌이는 로렌스 서머스 미국 전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Fed) 전 의장 사이에서 벌어진 ‘블로그 논쟁’이다. 최근에는 감정과 자존심 싸움까지 겹치면서 ‘블로그 전쟁’이란 표현까지 나온다.

논쟁의 발단은 미국 경제 진단부터 시작된다. 작년 3분기 5%까지 치솟았던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4분기에 2.2%로 둔화됐고 올해 1분기에 0.2%로 더 떨어졌다. 2011년 8월 신용 등급 강등 이후 벌어졌던 미국 경제의 ‘소프트 패치(경기 회복 후 일시적인 침체)’ 논쟁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머스 전 장관은 작년 4분기 이후의 경기 둔화 조짐을 장기 침체에 들어가는 초기 단계로 진단한다. 장기 침체론은 1938년 당시 엘빈 핸슨 하버드대 교수가 처음 주장했던 ‘구조적 장기 침체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가설은 특정국의 경기를 총공급(AS) 곡선과 총수요(AD) 곡선으로 설명한다. AD 곡선은 투자와 저축을 의미하는 ‘IS 곡선’, 유동성 선호와 화폐 공급을 의미하는 ‘LM 곡선’에 의해 도출되고 노동시장과 생산함수에 의해 결정된다. 상품·화폐·노동 등 모든 시장을 망라하는 ‘AD’가 ‘AS’보다 부족하다면 경기 침체는 구조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이 서머스 전 장관의 주장이다.
양적 완화는 ‘마약’ 같은 악습?
구조적 장기 침체 가설에 대해 버냉키 전 의장은 ‘과잉 저축 가설’로 대응한다. 논리는 간단하다. 저축이 소비보다 많으면 경기가 둔화된다는 ‘절약의 역설’이다. 특히 미국처럼 총수요 항목별 소득 기여도에서 민간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70%가 넘는 경제에서는 절약의 역설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버냉키, “쌍둥이 과잉 저축이 문제”
버냉키 전 의장은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 경제가 나라 안팎으로 ‘쌍둥이 과잉 저축론’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대외적으로는 금융 위기 이전부터 미국의 주요 수출 지역인 아시아 국가가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외화를 과다하게 쌓고 있는 것이 미국 경제를 어렵게 해 왔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미국 내부적으로는 사상 초유의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소비는 줄고 저축만 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업가 정신마저 쇠퇴해 기업인이 투자에 선뜻 나서지 않는 것도 미국 경제가 쉽게 회복되지 못하는 이유라고 지적한다. 회복세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속도가 종전에 비해 더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책 처방을 놓고 벌이는 논쟁은 더 뜨겁다. 서머스 전 장관은 일시적인 ‘마약’에 불과한 ‘양적 완화’와 ‘제로 금리’는 하루빨리 철회돼야 할 ‘악습’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 대신 단기적으로 재정지출 증대를 통해 총수요를 창출하고 중·장기적으로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미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버냉키 전 의장은 나라 안팎의 쌍둥이 과잉 저축의 원인이 금리 수준이 너무 높은 데 있는 만큼 정책 금리와 양적 완화를 통해 충분히 낮춰 주면 금융 위기가 극복되고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달러 가치마저 떨어져 수출이 증대되고 미국 내에서 소비가 미약하더라도 이를 보완해 미국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 버냉키식 정책 처방의 핵심이다. 재닛 옐런 Fed 의장이 달러 강세를 일관되게 우려해 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해된다.

두 석학의 논쟁에 다른 학자들은 쉽게 댓글을 달지 못한다. 그들의 명성이 위대한 만큼 섣불리 댓글을 달았다간 오히려 자기 명예에 금이 가는 ‘마라도나 효과’를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라도나 효과는 월드컵 영웅인 펠레와 함께 명성이 높은 마라도나가 다칠 것을 우려한 수비수가 미리 피해줌에 따라 골을 넣기가 더 쉬워졌다는 데서 비롯된 용어다.

유일하게 의견을 내놓은 학자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다. 크루그먼 교수는 당면한 국가 채무를 줄이기 위해 재정지출을 삭감해야 한다는 ‘로코프 독트린’에 반대한다. 오히려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 ‘크루그먼 독트린’이다.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버냉키 전 의장보다 더 과감하다. 버냉키 전 의장이 주장하는 인플레이션 타기팅 선 2%를 4%로 대폭 상향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내 증시를 비롯해 세계 증시에서 ‘과연 유동성 장세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가 최대 관심사다. 작년 3분기까지 주춤거렸던 글로벌 증시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심지어 올 2월 말까지 각종 위기설에 휩싸였던 러시아·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터키·브라질·인도네시아 증시마저 저가 메리트가 겹치면서 반등 국면에 재진입했다.

글로벌 증시가 강한 상승세를 보이는 속에서도 세계 경기는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회복 국면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경제만 하더라도 노무라증권·BNP파리바·IHS이코노미스트 등이 올해 성장률이 2%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아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행도 4월 수정 전망을 기존 3.4%에서 3.1%까지 하향 조정했다.


당분간 통화 완화 지속될 것
세계 경기 둔화 속에 글로벌 증시가 활황을 보임에 따라 한편에서는 유동성 장세에 대한 기대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증시 거품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앞으로 글로벌 증시에 ‘2단계 유동성 장세가 나타날 것인가’는 양적 완화를 중심으로 한 각국의 통화 완화 정책이 금융시장 안정과 실물 경기 회복에 기여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예상된다.

각국의 통화 완화 정책이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한다면 실물 경기가 회복되기까지 그 정책 기조가 지속되고 증시는 유동성을 바탕으로 ‘2단계 유동성 장세’가 올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증시를 비롯한 자산시장에 낀 ‘거품’ 우려로 실물 경기가 회복되기 이전이라도 ‘긴축’ 기조로 돌아서 증시에 충격을 줄 수 있다.

금융 위기 이후 각국의 통화 완화 정책은 금융시장 안정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물 경기 회복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앞으로 통화정책이 서머스 전 장관의 주장대로 긴축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낮다는 의미다. 반대로 크루그먼 교수의 시각대로 보다 과감한 통화 완화 정책이 추진된다면 지금보다 더 큰 유동성 장세가 오겠지만 거품 부담이 크다. 당분간은 버냉키-옐런식 통화정책이 계속 추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