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 플레이어 이후 히트작 없어…고음질 ‘아스텔앤컨’ 작년 상반기만 100억 매출

2001년 530억 원을 찍은 매출액이 이듬해에는 799억 원으로 훌쩍 뛰었다. 불과 3년 전 비메모리 반도체 판매를 위해 설립했던 회사는 어느새 가장 핫한 전자 기기인 MP3 플레이어 제조사로 변신했다. 2003년부터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2259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한 데 이어 2004년에는 4540억 원을 돌파했다.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은 모델이 사과(애플)를 씹어 먹는 뉴욕 한복판의 옥외 광고가 하릅강아지의 호기로 보이지만은 않던 시절이었다.
아이리버, ‘초심 회귀’로 부른 부활의 노래
2004년 당시 아이리버의 MP3 플레이어는 국내 시장점유율 75%, 해외 시장점유율 25%를 차지하고 있던 절대 강자였다. 해외 MP3 플레이어 유저들 4명 가운데 1명이 아이리버 제품을 귀에 꽂았다는 뜻이다. 글로벌 공룡인 애플의 아이팟에 대적할 플레이어도 아이리버가 유일했다. 애초에 휴대용 MP3 플레이어라는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리버의 판매량은 국내 MP3 플레이어의 판매량과 동의어였다.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동차가 시속 50km로 달릴 때와 200km로 달릴 때의 시각(時角)은 다릅니다. 속도가 느리면 그 대신 넓게 볼 수 있죠. 200km는 앞밖에 못 봐요. ‘동체시력’이 약해지는 거죠. 그때 아이리버가 그랬습니다. 연구·개발(R&D)과 마케팅·영업·바이어·소매업자, 심지어 소비자까지 모두 만들면 팔린다고 생각했어요.”

창업 초기인 2001년부터 일해 온 정석원 마케팅 담당 상무의 회고다. 그의 말대로 공급이 판매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으니 생산능력 확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100% 외주였던 공장 시스템은 2005년 중국 둥관 공장 완공을 통해 자체 제작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연산 500만 대. 기존 생산량을 2배로 끌어올린 대형 설비였다.

창업자인 양덕준 전 대표의 주특기도 아이리버의 성공을 가져 온 숨은 배경이다. 양 전 대표는 삼성전자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영업담당 임원 출신이다.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와 비메모리로 나뉘는데, 메모리는 집적도를 높이고 선폭을 좁게 해 용량을 키우는 게 최우선이다. 이에 비해 비메모리 반도체는 컴퓨터·휴대전화의 중앙처리장치(CPU) 등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제조사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비메모리 반도체는 직접 전자기기 제조사를 찾아다니며 기술 영업에 공을 들여야 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죠. MP3 플레이어를 만드는 제조사를 찾아가 ‘우리 반도체를 쓰면 이러이러한 수준의 성능을 구현할 수 있다’며 세일즈하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 제조사들의 역량이 그리 높지 않았어요. 반도체를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곳이 태반이었죠. 상대적으로 레인콤(옛 아이리버, 2009년 사명 변경) 임직원들의 역량이 전자기기 제조사들보다 높았어요. 그러니 하드웨어를 설계하고 펌웨어를 만들어 보여주는 수준까지 간 겁니다. 거의 시제품 수준이었죠. ‘이럴 바에 우리가 만들어 보자’는 소리가 나오는 게 당연했어요.”(정석원 상무)

200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아이리버의 역사는 휴대용 디지털 뮤직 플레이어의 역사와 같았다. 1999년 자본금 3억 원, 직원 7명으로 시작한 레인콤은 이듬해 세계 최초로 멀티 코덱이 가능한 콤팩트디스크(CD) 플레이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02년에는 MP3 파일과 일반 CD를 동시에 재생하는 MP3 플레이어를 만들었다. 역시 세계 최초였다. 뭐든 아이리버가 하면 최초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증권시장에도 화려하게 입성했다. 2003년 12월 코스닥 시장에 공모가 4만7000원에 상장된 주식은 한 달 만에 주당 12만4500원까지 뛰었다. 2004년에는 대망의 ‘1억 달러 수출의 탑’도 수상했다.

순식간에 맞은 영광만큼이나 몰락은 한순간이었다. 강력한 파워를 지닌 경쟁자가 나타나자 삼각기둥 모양의 ‘프리즘’ 시리즈가 MP3 플레이어의 전부라는 인식에 금이 가는 것도 잠깐이었다. 애플 ‘아이팟’의 등장은 이후 이어질 부침의 서막을 알렸다.

본격적인 전쟁은 2003년 무렵 시작됐다. 그해 4월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 서비스의 문이 열리자 경쟁의 틀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애플은 단순한 디바이스 제조사에 머무르지 않았다. 카세트테이프와 LP, 이후 CD로 바뀐 음악(음반) 시장은 이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내려 받는 ‘음원’의 시대로 옮겨갔다. 장당 1만 원에 달했던 가격은 곡당 0.99달러의 값어치로 ‘다운’됐다.
아이리버, ‘초심 회귀’로 부른 부활의 노래
새로운 음악 생태계를 창조해 낸 곳이 산업의 이니셔티브를 가져간 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는 플레이어를 만들었느니 음원은 알아서 구하라’는 기존 방식과는 경쟁 자체가 되지 않았다. 시장을 잠식해 오던 ‘아이(i)’의 그림자는 2004년 들어 아이팟 ‘미니’ 시리즈로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기 시작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MP3 플레이어뿐이었다면 승부의 추가 그렇게까지 하릴없이 기울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아니 준비 자체가 불가능했던 괴물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2007년이다. 스마트폰, 바꿔 말해 ‘아이폰’의 등장이었다.


아이팟·아이폰 등장하며 ‘휘청’
MP3 플레이는 물론 인터넷 접속, 메시지 전송, 카메라, 거기에 전화까지 되는 듣도 보도 못했던 디바이스가 아이폰이었다. 괴물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MP3 플레이어, 디지털 녹음기, 내비게이션, 전자사전, 전자책 단말기까지 하나의 기기가 구현해 내면서 진정한 컨버전스를 실현했다.

아이팟이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존재에도 아이리버는 2004년 45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2005년 들어 4300억 원으로 소폭 감소했지만 아무도 그해가 내리막길의 시작인지는 눈치 채지 못했다. 매출보다 심각한 것은 영업이익의 적자 전환이었다. 2005년 111억 원 적자를 시작으로 2006년에는 적자 규모가 544억 원으로 늘었다. 2007년, 2008년에는 간신히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2009년 들어 다시 230억 원 적자로 돌아섰고 이후 2012년을 제외하곤 2013년까지 연이어 내리막길을 걸었다. ‘매출 5000억 원 돌파는 시간문제’라던 장밋빛 전망은 어느새 고릿적 이야기가 돼버렸다. 2013년에는 매출 542억 원, 영업이익 마이너스 44억 원의 부실덩어리 중소기업으로 전락했다.
아이리버, ‘초심 회귀’로 부른 부활의 노래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MP4 플레이어, PMP, 전자사전, 내비게이션, 전자책 단말기, 인터넷 전화기, 태블릿, 스마트폰, 휴대용 게임기, 하다못해 스마트폰 액세서리까지 내놓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매번 신통치 않았다. 그 사이 ‘만들면 팔리던 회사’는 ‘뭘 해도 그저 그런 회사’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기업의 규모 자체가 쪼그라들고 영업이익이 곤두박질치자 수면 위로 먼저 떠오른 게 직원 처우 문제였다. 여기에 손대는 프로젝트마다 신통치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자 심리적인 압박감이 더해졌다. 특히 밤을 새워 가며 연구·개발(R&D)에 매진했던 연구직 직원들의 사기가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이키기 힘든 내상은 자연 퇴사로 이어졌다. 한때 본사 인력만 400명에 달했던 규모는 현재 100명으로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드넓은 부지 한쪽에서 소규모 설비만 돌려야 했던 둥관 공장은 2012년 말에 매각을 진행해 2013년 들어 설비와 장비 등을 모두 팔아 치웠다.


400명 달했던 직원 100명으로 줄어
30·40 이후 세대에겐 이제 아이리버라는 브랜드 자체가 낯설다. 한 업계 관계자는 “1년 만에 트렌드가 급변하는 디지털 시장에서 10년의 세월과 부침은 영겁과 같다”고 표현했다. 소니의 ‘워크맨’이 향수로 다가오는 것처럼 아이리버와 MP3 플레이어는 박물관 한쪽에 박제돼 버렸다.

추억이 다시 현실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2년 10월 들어서다. 전 세계 오디오 마니아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 ‘작품’이 유럽과 미국·일본도 아닌 한국에서 출시됐다. ‘아스텔앤컨(Astell&Kern)’이라는 프리미엄 브랜드의 등장이자 아이리버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아스텔앤컨은 아이리버의 장기인 포터블 뮤직 플레이어로 회귀한 제품이다.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음악으로 변환하는 뮤직 플레이어라는 점에선 같지만 소리를 내는 방식, 즉 본질은 이전 제품과 완전히 다르다.
아이리버, ‘초심 회귀’로 부른 부활의 노래
아이리버의 장기인 MP3 플레이어는 쉽고 빠르고 가벼운 데이터(음원)가 바탕이다. MP3 파일의 음질은 카세트테이프보다 나은 수준이지만 CD는 물론 LP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아스텔앤컨이 구현하는 음원은 전문 녹음실에서 마스터링한 음질 수준으로, 이를 MQS(Mastering Quality Sound)라고 부른다. 흔히 듣는 CD 음질의 1000배 수준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세상의 모든 뮤직 플레이어는 전기 신호를 공기의 진동, 즉 스피커를 통해 재생한다. 스피커를 통해 우리의 귀로 들어온 소리는 아날로그다. 인간의 귀는 디지털 신호를 음악으로 해석할 수 없다. 아이리버가 소리의 질에 천착한다는 것은 디지털 기기 전문 기업이 아날로그 기업으로 육체 개조에 나선 것과 같았다.

2010년 당시 아이리버는 LG디스플레이와 함께 구글의 전자책 단말기 제조사로 선정됐다. 마침내 완성된 시제품을 들고 미국으로 날아간 게 그해 5월. 들뜬 마음으로 구글 관계자를 만났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구글이 원한 퀄리티와 시제품 간의 간극이 너무도 컸다.

‘두 달 후 구글이 새 제품을 내놓는다’는 소식이 이미 보도를 타고 전 세계에 알려진 터였다. 연구원 몇 명으론 어림도 없었다. 한번에 40명이 넘는 인원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호텔 1층의 가장 큰 회의실에 다닥다닥 자리를 잡고 앉아 추가 R&D에 착수했다. 정 상무는 “그야말로 비상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좁은 자리에서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어요. 2주쯤 지나니 모두 이어폰을 꽂더군요. 그러다 한 연구원이 눈에 들어왔어요. 노트북 사운드카드가 좋지 않다며 PC용 DAC를 따로 구입해 듣고 있더군요. DAC는 ‘디지털 아날로그 컨버터(Digital Analog Converter)’의 약자로, 디지털 음원을 재생하는 모든 기기에 들어 있는 칩이에요. 그걸 몇 십만 원씩 따로 돈을 들여 듣고 있더란 말이죠.”

고급형 DAC를 타고 흐르는 고음질의 맛을 본 연구원들은 해당 제품이 ‘메이드 인 차이나’란 말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자연스럽게 “별것 아니다. 우리도 할 수 있겠다”란 반응들이 이어졌다.
아이리버, ‘초심 회귀’로 부른 부활의 노래
고음질 플레이어로 턴어라운드 성공
2011년 때마침 ‘소방수’로 박일환 삼보컴퓨터 전 대표가 새로운 사장으로 부임했다. 박 사장은 20여 년간 삼보컴퓨터에서 일한 정보기술(IT) 전문가였다. 아이리버와 함께 비유되곤 하던 삼보의 법정 관리인을 맡아 회생을 주도한 실력가였다. ‘아이리버 부활의 열쇠는 무엇인가?’ 신임 대표와 내부 직원들의 고민은 다르지 않았다. 결론은 이미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마트폰이 삼켜버린 디지털 디바이스로는 더 이상 답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야 한다는 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티어 드롭(Tear Drop)’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궁극의 음질로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을 줄 플레이어를 만들자’는 의견이 임직원들과 신임 사장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2011년 하반기에 본격 개발에 들어가 1년에 걸쳐 나온 작품이 아스텔앤컨 AK100이다. 현재는 AK240과 거치형 모델인 AK500N까지 8종의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최고 사양의 MP3 플레이어를 새로 개발하는 데 반 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 것과 비교하면 아이리버가 아스텔앤컨에서 들인 공을 짐작할 수 있다.

아스텔앤컨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MQS를 그대로 재생하는 데 성공했다.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음질 하이파이 시스템을 손 안에 들어오는 포터블에 재현한 셈이다. 아이리버가 늘 그랬듯이 세계 최초였다.

2013년 7월 영국의 주요 오디오 매거진 ‘사운드앤비전’은 아스텔앤컨의 AK100을 두고 “포터블 뮤직 플레이어가 어떤 것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최고의 뮤직 플레이어”라며 극찬했다. 2014년 4월 전 세계 오디오 마니아들의 커뮤니티 ‘헤드파이(Head-Fi)’는 “현 시장에서 최고의 소리를 내는 플레이어”라는 평가를 내렸다. 수상도 이어졌다. AK120 모델이 2014 세계 가전 박람회(CES)에서 ‘디자인·기술 혁신상’을 받은 데 이어 2015년 CES에선 AK500N 모델이 영국 오디오 전문지 ‘왓하이파이’로부터 ‘2015 CES의 별’ 상을 받았다. 아스텔앤컨 라인업의 글로벌 수상 성과는 8개국, 21개 미디어, 46차례 수상에 이른다.

‘아스텔(Astell)’은 헬라어로 ‘별’을, ‘컨(Kern)’은 독일어로 중심을 뜻한다. ‘음악의 중심이 돼 아이리버 부활의 빛이 되겠다’는 의지를 담은 브랜드다. ‘음원 재생’이라는 초심 회귀와 고급화 전략은 시장의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2013년 44억 원에 달했던 영업적자는 2014년 17억 원 영업이익을 달성하며 턴어라운드했다.

2011년 개별 제품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전자사전(30.5%)은 2014년 들어 6.2%로 줄었다. 반면 아스텔앤컨이 처음 출시된 2012년 17.5%에 불과했던 하이파이 오디오는 2014년 들어 54%로 뛰어오르며 아이리버의 흑자 전환을 주도했다. 아스텔앤컨은 2014년 상반기에만 100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는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배 수준이다. MP3 플레이어로 세상에 없던 제품을 창조해 낸 아이리버가 12년 만에 또다시 창조적 자기 파괴를 통해 얻은 성과다.

아스텔앤컨의 인기는 해외에서 더욱 폭발적이다. 특히 세계 최대인 미국과 맞먹는 규모의 음악 시장을 갖춘 일본의 반응이 ‘어마어마하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말이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MP3 음원의 3배 정도로 고가에 팔리는 고해상(DSD) 음원 시장과 수요가 자리 잡고 있다. 아이리버도 아스텔앤컨 출시와 동시에 ‘그루버스’ 사이트를 오픈하고 DSD급 음원을 공급하고 있다.



인터뷰 | 박일환 아이리버 사장
아이리버, ‘초심 회귀’로 부른 부활의 노래
“네트워크 연동으로 진화할 것”

박일환 사장은 법정 관리 체제로 넘어간 삼보컴퓨터의 회생을 주도한 주인공이다. 2011년 아이리버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도 임무는 비슷했다. 쓰러져 가던 기업의 회생이었다.


기술적 한계로 포기했던 아이템을 다시 선택한 이유가 있나.
“잘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기술적 난이도가 요구되는지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전무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나. 오늘 아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뛰어들지 못했을 것이다.”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같은데.
“디지털은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 해상도, CPU 용량, 각종 사양을 숫자로 정량화한다. 처음엔 우리도 디지털로 접근했다. 다행스럽게도 첫 시제품의 소리가 괜찮았다. 여기에 정확한 측정치만 더하면 ‘티어 드롭’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정확히 맞춘 둘째 시제품의 소리가 어땠을까. 전혀 아니었다. 단순한 기계적 측정치로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1년이나 시행착오를 겪은 이유다.”


사내에 소리 전문가는 없었나.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이를 ‘골든이어’라고 부른다. 소니에서 ‘슈퍼오디오시디(SACD 혹은 DSD)’를 개발한 모리 씨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교제할 기회가 생겨 ‘어떻게 하면 골든이어가 될 수 있나’ 물었더니 ‘타고나야 하는데, 그걸 안 순간부터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모리 씨는 젊은 시절 배낭 하나 메고 몇 년간 유럽을 돌며 일류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다행히 아이리버 사내에도 골든이어 소질을 갖춘 이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배우는 중이다.”


전통의 오디오 명가들을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소리는 모른다. ‘매킨토시의 소리는 따뜻하다’거나 ‘뱅앤올룹슨은 날카롭다’ 같은 특징이 우리에겐 없다. 다만 소리에 대한 우리의 철학은 원음이다. 녹음 기술은 엄청난 수준으로 발전했다. 거의 퀀텀 점프 수준이다. 원음 그대로를 담을 수 있을 정도다. 이걸 우리의 플레이어를 통해 그대로 전달하자는 게 우리의 목표이자 철학이다. 아스텔앤컨이 추구하는 소리는 없다. 다만 그대로 전달할 뿐이다.”


2014년 SK텔레콤에 인수·합병됐다. 시너지가 발휘되고 있나.
SK텔레콤의 패밀리가 됨으로써 네트워크 인프라와 디바이스의 장점이 합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아스텔앤컨을 네트워크화해 유저 간 연동되는 시스템을 계획 중이다. SK텔레콤과 여러 시도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여러 작업들을 물밑에서 진행하고 있다. 아이리버의 해외 비즈니스 신뢰도도 높아졌다. 무형의 시너지다.”


MP3 플레이어, 아스텔앤컨 모두 전혀 새로운 도전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당장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가 있다. 역시 무모한 시도라고 볼 수 있지만 기대해도 좋다. 올해 안에 가시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음악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서 업계 장인과 거장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런 인연들이 자연스럽게 비즈니스로 연결될 것 같다.”



돋보기
‘음악’ 산업과 ‘음원’ 산업의 아이러니

바흐나 모차르트 시대의 음악은 교회든 궁정이든 직접 찾아가 듣는 수밖에 없었다.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음악(음원)은 비로소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가 됐다. 1950년대 LP가 발명되고 1960년대 카세트테이프가 나오기까지 음원 재생은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을 택했다. 음악 산업이 본격적인 디지털의 시대에 접어든 것은 1980년대 CD가 출현하면서부터다. CD는 저장 공간(용량)은 물론 음질 면에서 과거의 매체들을 압도했다. 1990년대 들어선 소니와 필립스가 공동으로 SACD(DSD) 규격을 만들며 원음에 가까운 음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음악 산업은 또 한 번의 개벽을 맞는다. MP3 파일로 상징되는 디지털 음원 시장의 대중화다. 음원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이 좀 더 간편하고 빠르고 값싸게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반면 동시에 음악 산업의 규모 자체는 쪼그라들었다. 음질 역시 마찬가지 수순을 밟았는데, MP3의 음질은 카세트테이프보다 낫지만 LP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재미있는 현상은 아이폰이 등장한 2007년부터 구시대의 유물 같던 LP 판매량이 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2000년 150만 장이었던 미국의 LP 판매량은 2006년 90만 장까지 떨어지더니 2007년부터 꾸준히 상승해 2012년에는 450만 장까지 늘었다. 번거롭고 비용이 들더라도 귀를 만족시킬 고해상 음원에 대한 수요가 반대급부로 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자료다. CD에서 디지털 파일로 넘어가며 침체기를 겪은 음악 산업도 2009년을 기점으론 서서히 살아나는 추세다. 박일환 아이리버 사장은 이를 가리켜 “홍수가 나면 먹을 물이 없다”고 표현한다. 싸구려 음원이 범람하는 만큼 깨끗한 물을 찾는 수요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