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월 새 금리 인상·인하 반복…1998년 모라토리엄 악몽 살아나
2013년 11월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비롯된 러시아 경제 위기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올 들어 러시아 경제가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보이고 국가 유동성 지표마저 악화됨에 따라 미국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국가 신용 등급을 투기 등급인 ‘BB+’로 강등했다. 믿을 수 없는 쓰레기 채권이라는 정크 본드 수준이다.더 우려되는 것은 러시아 중앙은행(CBR)이 한 달 간격으로 정책 금리를 올렸다가 내려 혼선을 빚고 있는 점이다. CBR는 작년 12월 정책 금리를 10.5%에서 17%로 한꺼번에 6.5% 포인트 인상해 통화정책의 전달 경로 등 금융 시스템과 시장이 무너진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았다.
루블화 가치 폭락…물가 급등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인 올해 1월 말에 정책 금리를 17%에서 15%로 2% 포인트 기습적으로 내려 그 배경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 금융시장은 재차 난기류에 빠지면서 루블화 가치가 달러당 70루블대로 폭락함에 따라 ‘제2의 모라토리엄’에 대한 우려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원유·석유 관련 제품 및 천연가스 수출이 총수출의 60%를 넘을 정도로 지나치게 에너지에 의존하는 천수답 구조다. 2012년 이후 국제 원자재 가격의 슈퍼 사이클 국면이 마무리되면서 둔화되기 시작한 성장률은 지난해 0.2%(IMF 추정)로 마이너스 국면 직전까지 몰렸다.
반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루블화 가치 절하 ▷서방의 경제제재에 대한 보복 조치에 따른 식료품 수입 금지 등으로 11%대까지 급등했다. 성장률이 하락하는 가운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급등함에 따라 앞으로 국제 유가 하락 등의 충격이 지속되면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러시아로 유입됐던 외국 자금이 빠르게 유출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방과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지정학적 위험이 크게 높아졌던 지난해 약 1300억 달러가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 국가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올 들어서도 외국 자금 유출이 지속되는 추세다.
루블화 환율은 2014년 말 연초 대비 약 41.8% 하락했다. 올해 1월 말에는 72루블대로 폭락했다. 작년 12월 러시아 중앙은행은 두 차례 금리를 인상했다. 특히 16일에는 6.5% 포인트나 대폭 인상해 루블화 가치를 방어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하고 올 들어 더 악화되는 모습이다.
올 들어 러시아 경제는 국제 유가 하락→수출 감소·경상적자 확대→외국인 투자자 엑소더스→루블화 폭락→외화보유액 감소 및 재정 적자 확대의 ‘나선형 악순환 고리’에 빠지고 있다. 통화정책 측면에서 외자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금리 인상을,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할 기로에 놓인 것이다.
1998년의 모라토리엄 상황과 비교해 보자. 1993~1994년 당시 미국은 경제 호전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자 중앙은행(Fed)이 1994년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급격한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달러가 강세를 나타내면서 원자재 가격이 급락했고 1998년 7월 말 러시아 의회의 위기 극복 프로그램 승인이 거부되면서 단기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주가는 폭락했다. 심각한 유동성에 시달렸던 러시아 은행들은 마침내 지급 불능 상태에 이르렀고 러시아 정부는 같은 해 8월 17일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이 선언이 있기 전까지 선진국 증시는 강세, 신흥국 증시는 약세를 보이는 디커플링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1997년부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증시는 외환위기를 겪으며 곤두박질쳤다.
유가 급락·경제제재 ‘악재’
최근 러시아 경제는 기초 여건 측면에선 과거 1998년 채무 불이행 시기에 비해 단기적인 대응 능력이나 상황이 양호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전체 국가 채무 수준은 15년 동안 하락해 왔다. 1997년 말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 국가 부채 규모는 약 50%였지만 2013년에는 13% 수준에 그치고 있다.
외화 유동성도 과거보다 풍부한 상황으로 외화보유액은 1997년 말 176억 달러(GDP 대비 약 4%) 수준에서 2014년 말 기준 3832억 달러(GDP 대비 17.8%)로 늘어났다. 단기 채무 상환 부담도 이전보다 감소했다. 1997년 말 33.5%를 기록했던 외화보유액 대비 단기 외채 규모는 2014년 상반기 기준 18%로 낮아진 상황이다.
러시아 경제는 1998년 당시와 달리 외화보유액, 정부 부채 규모 등의 측면에서 대응 능력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제 유가 하락과 부패에 따른 푸틴 정부의 지지도 추락, 서방의 제재가 계속되면서 경기와 재정 상황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러시아 상황이 순식간에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현재 러시아가 처한 대외 상황은 1998년에 비해 비우호적이다. 그 당시에는 서방 진영이 대외 부채를 감축하고 구제금융 자금을 지원하는 등 러시아 경제 회생에 적극 협조했었다. 국제 유가도 모라토리엄 이후 반등해 러시아 경제에 우호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에는 서방의 경제제재가 지속되고 있고 추가적인 제재 조치가 취해질 가능성까지 있다. 국제 유가 역시 과잉공급과 수요 약화라는 복합적 요인으로 하락하고 있는 만큼 추가 하락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반등한다고 하더라도 저유가 추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지표로는 아직까지 ‘제2의 러시아 모라토리엄’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세계경제와 국제 금융시장에 계속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 사태가 악화되면 한국은 러시아에 대한 수출 비중이나 금융회사의 외화 익스포저(리스크에 노출된 금액) 규모가 미미해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교역 비중이 큰 유럽의 수요 약화 가능성, 러시아 사태와 맞물린 미국의 정책 금리 인상 시그널 등에 따른 이머징 시장의 자금 유출이 국내시장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경제에도 그 어느 때보다 선제적인 대책이 필요한 때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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