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분 이전은 이미 끝났지만 경영 능력 미지수…59세인 박용만 회장도 건재

[비즈니스 포커스] 아직 갈 길 먼 두산 4세의 ‘사촌 경영’
자산 기준 재계 12위인 두산그룹은 국내 재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먼저 118년 역사의 두산그룹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최장수 기업이다. 또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두산그룹의 주력 사업은 두 차례나 완전히 바뀌었다. 창업주 시절에는 포목점을 하다가 2대 시절에는 이를 다 정리하고 식음료로 바꿨다. 3대 때인 1996년에는 다시 식음료를 모두 정리하고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옛 대우종합기계) 등을 잇달아 인수해 중공업 그룹으로 탈바꿈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3조3000억 원이었던 매출이 2013년 22조 원으로 늘어날 정도로 두산의 사업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또 하나가 유례없는 ‘3대 형제 경영’에 이은 ‘4대 사촌 경영’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다. 현재 3대 형제 경영의 중심은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다. 그는 최근 ‘SNS 스타’로 주목받으면서 대중에게 한층 친근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박 회장은 “두산은 특정 회사나 사업(패밀리 비즈니스)을 물려받은 게 아니라 ‘사업을 하는 집안(비즈니스 패밀리)’이라는 전통을 물려받았다. 이 전통은 지금의 3세대에 그치지 않고 4세대 이후로까지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경영의 정점에는 3세대가 있지만 이미 그룹 지배력은 4세들에게 넘어가 있다. 박 회장 등 3세들이 가진 그룹 지주사 (주)두산 지분이 11.59%에 불과한 데 비해 4세들이 가진 지분이 30%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포커스] 아직 갈 길 먼 두산 4세의 ‘사촌 경영’
특히 이런 와중에 두산그룹과 거리를 뒀던 박 회장의 장남 박서원 부사장이 최근 계열사인 오리콤에 들어오면서 4세 경영이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박 부사장의 오리콤 합류로 두산 4세 대다수가 그룹 경영에 참여하는 그림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두산가 4세 경영의 정점에는 박정원 (주)두산 회장 겸 두산건설 회장이 있다. 박정원 회장은 두산그룹의 가장 큰 어른인 박용곤 명예회장 장남으로 (주)두산 지분 6.40%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이어 박용곤 회장의 차남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이 4.27%로 2대 주주 위치에 있다. 그룹 총수인 박용만 회장의 지분(4.17%)은 이들의 지분에 못 미친다.


‘경기 부진’에 발목 잡힌 계열사들
이 밖에 두산 4세들은 지주회사의 지분을 모두 나눠 가지고 있다. 박진원 두산 산업차량BG 사장(박용성 중앙대 이사장 장남)이 3.64%, 박석원 두산엔진 상무(박용성 이사장 차남) 2.98%, 박태원(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장남) 두산건설 부사장 2.69%, 박서원 오리콤 부사장이 1.96%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지분 증여가 사실상 마무리된 두산그룹이 4세 사촌 중 장자인 박정원 회장 중심으로 차기 경영 구도를 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박정원 회장이 두산건설은 물론 이미 2012년부터 (주)두산의 지주부문 회장을 맡고 있는 것도 4세 후계 구도를 자연스럽게 만들려는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물론 두산이 3대째와 마찬가지로 4대에 와서도 지금과 같은 일종의 공동경영을 유지할지는 미지수다. 두산그룹 측에서도 아직 4대 경영에 대한 것은 구체화된 게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박용만 회장의 말처럼 두산의 전통이 살아 있는 한 특별한 불협화음만 없다면 4세 때도 공동경영이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골고루 분산된 지분에 따라 공동체를 형성하는 두산 일가의 지배 구조를 고려할 때 어느 한 사람이 그룹 경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룹의 체질을 바꾸며 외환위기와 금융 위기를 슬기롭게 넘긴 3세대처럼 4세대들이 경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4세들이 자기 실력을 보여줘야 경영권 후계 구도 구축 작업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두산그룹에 놓인 상황은 쉽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현재 두산그룹은 중공업 중심의 그룹사다. 중공업은 전형적인 경기 산업이다. 잘될 때는 더 잘되지만 안 될 때는 더 안 되는 게 경기 산업이다. 실제로 두산그룹 핵심 기업들의 실적은 지지부진하다.

그룹 주력사인 두산중공업은 수주 부진이 문제다. 9월 말 기준으로 두산중공업의 수주 잔액은 4조 원가량이다. 연간 수주 목표(10조 원)의 40% 정도만 채운 상태다. 이 같은 수주 부진 등에 영향을 받아 두산중공업 주가는 지난 7월 24일 3만4000원을 기록한 이후 30% 정도 하락해 10월 30일 기준 2만3000원까지 밀렸다. 글로벌 금융 위기 직전 미국 중장비 업체 밥캣을 인수해 한동안 고전했던 두산인프라코어는 북미 시장 부동산 시장이 회복되면서 잠시 활력을 되찾았지만 최근에는 중국 경쟁 업체의 위협에 놓여 있다.

두산건설은 가장 어렵다. 지난해부터 흑자를 내기는 했지만 4세대 경영을 이끌 것으로 예상되는 박정원 회장이 직접 이끄는 기업이라 부담은 더 크다.
[비즈니스 포커스] 아직 갈 길 먼 두산 4세의 ‘사촌 경영’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산그룹 오너들은 보유 주식의 대부분이 담보로 잡혀 있을 정도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 4월 기준으로 두산가 33인의 주식 자산 9400억 원 중 8940억 원어치가 담보로 제공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식 담보 비율은 95.1%에 달했다.


4세대, ‘신성장 동력’ 어떻게 할까
물론 4대 경영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1955년생으로 올해 59세인 박용만 회장이 아직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원 회장 역시 1962년생으로 올해 52세다. 삼촌 박용만 회장과 나이가 일곱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나이만으로 보면 박정원 회장이 그룹을 이끌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결국 재계에서는 두산이 신성장 동력으로 삼는 연료전지, 3D 프린팅 사업 등을 추진하는 데 4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박정원 회장은 삼촌인 박용만 그룹 회장을 도와 주택용 연료전지 업체인 퓨얼셀파워, 건물용 연료전지 원천 기술을 보유한 미국 클리어에지파워를 잇따라 인수·합병(M&A)하면서 연료전지 사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키우는 데 많이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박지원 부회장은 두산중공업의 전신인 한국중공업의 민영화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두산중공업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변모시킨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두산가 4세들이 경영권을 이양 받는 데 충분할 정도로 지분 이양이 이뤄진 상황이지만 문제는 경영인으로서 입지를 다질 정도의 성과가 없다는 것”이라며 “그룹의 차세대 성장 동력 산업을 육성하는 데 성과를 보여줘야 경영권 승계를 논의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