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황 장기 부진에 젊은 증권맨 “퇴직금이라도 받자”

[여의도의 눈물] 올해 여의도서 2000명 떠난다
“요즘 여의도는 대낮에도 썰렁할 때가 많아요. 예전엔 정보도 교환하고 친분도 쌓을 겸 회사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증권맨들이 많았는데 그런 모습도 보기 힘들어요.” (모 증권사 홍보 담당)

“증권업계의 좋은 시절은 지난 것 같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른 업종으로 갈아타려고 퇴직을 신청했어요. 그동안 회사 사정이 어렵다 보니 보너스나 성과급은 고사하고 월급 받을 때조차 눈치가 보였는데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대기업 재무팀에 들어가려고요.” (모 증권사 6년 차 직원)

증권맨들이 여의도에서 짐을 싸고 있다. 업황 악화로 증권사들이 줄줄이 구조조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증권사 임직원 수는 3만9146명으로 임직원 수가 정점을 찍은 2011년 말(4만4060명)과 비교해 무려 5317명이 업계를 떠났다. 2013년 말 기준(4만214명)으로 3개월 만에 1000여 명이 증권업을 그만뒀다.

증권사들이 구조조정에 나서는 이유는 뚜렷하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2월 발표한 ‘2013 회계연도(4~12월) 증권회사 영업실적’을 보면 지난해 국내 증권사 62곳 중 45%인 28곳이 적자를 냈다. 증권사 전체 실적도 1098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회계연도 기준으로 증권사들이 적자를 기록한 것은 2002년 이후 11년 만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정비를 줄이기 위해 국내 증권사들은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현재 희망퇴직을 시행 중이거나 예정인 증권사의 퇴직 인원 규모를 합산하면 올해에만 2000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지난 연말부터 KTB투자증권 100명, SK증권 200명, 한화투자증권 350명이 회사를 떠났고 유안타증권에 인수되는 동양증권도 올 초 650여 명의 대규모 인력 감축을 실시했다.


증권사 45%가 적자 상태
외환위기 때도 감원을 하지 않았던 대신증권은 경영난을 이유로 지난 5월 창사 52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시행했다. 대신증권 노동조합은 “직원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일방적인 구조조정”이라며 반발했지만 대신증권은 5월 말 퇴직 신청을 받았고 300여 명이 회사를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이 회사의 직원 수 2054명을 감안하면 15% 정도가 희망퇴직을 신청한 셈이다. 대신증권은 희망퇴직 시 근속 연수에 따라 10~24개월 치 급여를 지급하기로 했다. 20년 이상 1급 부장급 사원이라면 최고 2억5000만 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증권은 지난해 130명을 다른 삼성 계열사로 전환 배치한데 이어 올해 300여 명의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지난 4월 11일 김석 삼성증권 사장은 사내 방송을 통해 생존을 위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김 사장은 “어려운 시장 환경으로 증권업 자체가 저성장·저수익 상황에 직면한 데다 고객의 거래 행태가 변하고 있다”며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적자를 넘어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절박함을 호소했다. 삼성증권의 2013 회계연도 영업이익은 387억 원으로 전년(2371억 원)보다 83.69% 줄었다.

삼성증권은 경영 효율화를 위해 ‘인력 효율, 비용 절감, 점포 체계 개편’을 내걸었는데 인력 효율화의 일환으로 3년 이상 근무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고액 연봉자인 임원의 비율도 과감히 줄이기로 했다. 감축 대상 임원 6명 중 5명에 대해서는 보직을 면했고 나머지 1명은 삼성카드로 보내기로 했다. 삼성증권의 임원이 30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20%가량 감축된 것이다.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도 합병을 앞두고 조직 슬림화에 나섰다.

우리투자증권은 5월 말 직원 412명이 회사를 떠났다. 이는 전체 직원 2973명 중 13.8%에 달하는 인원이다. NH농협증권은 전 직원(858명)의 23%에 해당하는 196명의 희망퇴직을 확정지었다. 주로 이사·부장급 등 본사 고위직·관리직·정규직의 희망퇴직이 많았다.

이 때문에 NH농협증권 측은 이번 희망퇴직으로 중간 직급이 두터운 ‘종형’에서 ‘피라미드’로 구조가 바뀌어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김병관 NH농협증권 경영지원본부장은 “이번 희망퇴직으로 매년 약 153억 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며 “희망퇴직으로 침체된 조직 분위기를 추스르고 직원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소통과 화합 프로그램’을 실시할 계획”이라고도 덧붙였다.
[여의도의 눈물] 올해 여의도서 2000명 떠난다
그나마 한국투자증권과 미래에셋증권 직원들은 구조조정 안전지대에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최근 5년 동안 구조조정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점포(109개)도 기존대로 유지한다. 심지어 올해 하반기엔 100여 명 내외 신규 인력을 뽑겠다는 방침이다. 사업 부문을 다각화해 업황에 구애 받지 않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래에셋증권은 이미 2년 전에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해 다른 증권사들에 비해 경영 사정이 나은 편이란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한편 최근 증권사의 희망퇴직자 신청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금융 투자 업계에 따르면 과거엔 경력 10~15년 이상의 차장·부장급들이 퇴직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최근에는 경력 5~10년 미만의 30대 대리·과장급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황 부진이 길어지면서 증권 산업의 매력이 크게 추락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과거 대비 저임금과 고용 불안도 한몫했다.


대기업 취업하겠다는 젊은 증권맨들
한 증권업계 종사자는 “증권업 불황이 대세적인 흐름이라는 생각이 업계에 만연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여의도에서 발을 빼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한창 일을 배우고 보람을 느껴야 할 30대들의 증권업 엑소더스(탈출)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사를 떠난 애널리스트들은 자신이 맡았던 섹터(부문)의 기업 등에 재취업을 하는 편이다. 그나마 사정이 좋은 은행·카드사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증권맨들도 많다. 퇴직 후 잠시 쉬다가 억대의 연봉을 받고 타 증권사에 스카우트되는 사례는 ‘옛말’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증권 및 운용사를 떠난 매미(펀드매니저 출신의 개인 투자자), 애미(애널리스트 출신의 개인 투자자)들은 여의도의 S모 빌딩과 J모 빌딩에 중점적으로 둥지를 틀기도 해 “S증권사·J증권사가 새로 생겼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번처럼 대규모 희망퇴직이 가능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막차 효과란 분석도 나온다. 귀가 솔깃할 정도의 위로금과 퇴직금이 그 이유다. “차에 붙은 젖은 낙엽처럼 현재 회사에서 버티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던 증권맨들이 “이렇게 좋은 조건의 희망퇴직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며 퇴직 신청에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NH농협증권은 당초 100명 안팎의 희망퇴직을 예상했지만 100명이 더 몰렸다. 후한 퇴직금·위로금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NH농협증권이 20년 이상 근속자에게 23개월, 4년 미만 근속자에게는 13개월 치의 희망퇴직금을 지급하고 재취업 장려금과 장기근속 위로금, 조직 기여 공로금 등도 추가로 지급하기로 했다. 장기근속 위로금은 1년 단위 200만 원으로 최대 8년 치 1600만 원까지 지급하기로 했다. 금융업에 오래 몸담아 온 한 전문가는 “구조조정을 통해 단기적인 수익성 향상 효과는 볼 수 있지만 근로 의욕 저하 등 회사의 장기적인 성장에는 큰 도움이 안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김태현 NH농협증권 애널리스트는 보고서를 통해 “주수익원(톱 라인) 증가가 병행되지 않는 한 인원 10% 감소 시 자기자본이익률(ROE) 제고 효과는 0.7~0.9%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