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단 비서서 꿈을 이룬 ‘실리콘밸리의 여제’

칼리 피오리나(60) 칼리피오리나엔터프라이즈 회장은 말단 영업 사원 출신에서 1999년 휴렛팩커드(HP)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파워 우먼이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컴팩과의 합병을 성사시켜 재계를 놀라게 한 ‘여장부’로 통한다. 피오리나 회장은 HP 최초의 외부 출신 회장, 대형 컴퓨터 업계 최초의 여성 회장, 세계 상위 20대 기업 최초의 여성 회장 등 여러 기록을 세웠으며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로 6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피오리나 회장은 ‘실패 극복의 아이콘’으로도 많은 여성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05년 실적 부진으로 이사회와 갈등을 겪다가 HP에서 물러난 그는 갑작스레 유방암 진단을 받으면서 투병 생활을 시작했고 완쾌 후엔 정계 진출을 선언, 공화당의 캘리포니아 주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선출돼 2010년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비록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사회적 활동은 선거 이후 더 활발해졌다.

피오리나 회장은 특히 빈곤 지역 여성의 일자리 창출과 리더십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그는 쓸 만한 물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굿(GOOD) 360’ 이사회의 의장을 맡고 있으며 아프리카·인도·라틴아메리카 여성들의 소액 대출과 사업 자금을 지원하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술과 창업 노하우를 가르치는 기구인 ‘원 우먼 이니셔티브’의 설립자로 제도권 내 정치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피오리나 회장은 2013년 11월 하버드 경영대학원이 발간하는 학술 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기고문에서 “원 우먼 이니셔티브의 정말 적은 지원금(대출)으로 르완다·니카라과·필리핀 여성과 가족, 그들이 속한 사회 공동체 일부를 가난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며 “세계가 아직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레버리지 중 하나가 바로 여성, 특히 창업자가 될 수 있는 여성이며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엌으로 돌아가’ 조롱에 실력으로 맞서
피오리나 회장은 1954년생으로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태어났다. 헌법학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영국·아프리카 등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잦은 이사와 전학을 통해 모험을 즐기는 ‘강심장’으로 성장했다. 스탠퍼드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고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 한 학기 만에 자퇴했다. 이후 1977년 부동산 중개 회사에서 비서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미국 최대 통신회사 AT&T에 입사해 20년간 근무했다.

그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1996년 AT&T의 루슨트테크놀로지 분사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뉴욕 증시에 사상 최고 액수로 루슨트테크놀로지를 상장한 것이다. 그는 루슨트테크놀로지의 글로벌 서비스 부문 사장을 맡아 회사를 연매출 200억 달러의 기업으로 키웠고 1999년 HP 최초의 외부 출신 CEO로 선임됐다. 결과에 대해선 평가가 분분하지만 HP의 컴팩 인수는 당시 최대 성과로 꼽힌다.

피오리나 회장은 엔지니어를 숭배하는 남성 중심 문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첫 여성 리더였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숱한 편견과도 맞서야 했다. AT&T 영업 사원 시절에는 속이 다 비치는 야한 치마를 입은 여성 댄서들이 있는 스트립 클럽에서 남성 고객과 만나 제품을 설명해야 했고 컴팩 인수에 반대하던 HP 직원들로부터 ‘칼리, 부엌으로 가야지(Back to the kitchen, Carly)’라는 성차별적 조롱을 들었다. 그는 HP CEO가 된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도 “지금 입은 옷이 아르마니 슈트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며 일의 결과가 아니라 여성이란 이유로 외모나 옷차림으로 평가받아야 했던 때의 절망감을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쟁력이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했다”며 “하지만 인생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특히 그렇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편견 때문에 위축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과 실패를 폭넓게 경험한 피오리나 회장이 ‘한경비즈니스’ 초청으로 5월 30일 방한해 제주도와 고려대를 찾았다. 그가 던진 메시지는 ‘기업가 정신과 여성 리더십’, ‘위미노믹스(womenomics) 시대와 성공하는 리더의 조건’이었다.

위미노믹스는 여성(women)과 경제(economics)의 합성어로, 여성의 경제활동 비율이 늘고 경력 단절을 방지하면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이론이다. 캐시 마쓰이 골드만삭스 아시아조사분석부 공동대표가 일본 경제의 침체 요인을 분석하며 1999년부터 쓰기 시작한 용어다.

마쓰이 대표는 올해 3월 국내에서 열린 ‘위미노믹스 콘퍼런스’에서 한국 여성의 경제 참여율 확대가 한국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은 여성의 경제 참여율이 매우 낮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한국은 고급 교육을 받은 여성 인력이 많기 때문에 여성의 경제활동이 보다 활발해지면 한국의 정부와 민간 기업들은 굉장한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장률 견인, 여성 인력 활용에 달려
마쓰이 대표는 내한 당시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54.5%(2010년 기준)인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남성 수준인 77%까지 끌어올린다면 2025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현재보다 6% 정도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여성 인력 활용 현황은 어떨까. 한국은 위미노믹스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선진국에 비해 무척 낮다. 2012년 55.2%에 머물렀는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62.3%에 크게 못 미친다.

특히 고학력 여성의 경력 단절이 심각하다. LG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국 대졸 여성의 고용률은 60.5%로 OECD 평균인 79.3%와 20% 포인트 가까이 차이를 보인다.

이혜림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대졸 여성은 일단 경력 단절을 경험하면 아예 구직을 포기하게 되면서 40, 50대에도 고용률이 회복되지 못하는 L자형 곡선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은 고용 시장을 떠난 대졸 여성의 잠재 소득 손실분은 2012년 기준으로 약 30조 원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여성의 고학력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경력 단절에 따른 개인적·국가적 손실은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고령화로 노동인구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증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한국금융연구원은 직장 및 공공 보육 시설 확충을 통해 여성들의 직장 생활이 가능하도록 보육비용을 사회가 분담해야 하며 기혼 여성의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해 재택근무제나 시차출근제 등 유연근로제를 확산할 것을 제안했다. 고급 직군의 재취업 지원도 필요하다고 했다. 주변의 도움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다. 글로벌 평판 조회 전문 기업 퍼스트어드밴티지의 정혜련 한국 지사장은 “한국 여성들은 자녀 문제 등 가정에 일이 생길 때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런 때 여성 선배나 상사들이 멘토 역할을 해주면 경력 단절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여성 고용은 기업의 생존을 위한 것으로, 육아가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직결되는 이슈라는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칼리 피오리나가 걸어온 길
1954년생. 부친은 저명한 헌법학자 스탠퍼드대에서 철학과 중세 역사 전공. 졸업 후 부친의 권유로 UCLA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1학기 만에 자퇴.
1976년 팰러앨토 상업 부동산 중개 회사에서 비서로 사회생활 시작
1977년 첫 남편과 결혼해 이탈리아 볼로냐로 이주, 1년간 영어 강사로 활동
1978년 메릴랜드 주립대 경영대학원 입학
1980년 벨시스템 입사
1988년 MIT 슬론 경영대학원 석사 졸업
1999년 HP CEO
2005년 HP 퇴임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 존 매케인 캠프 참여
2009년 유방암 진단
2010년 공화당 후보로 상원의원 출마, 낙선

-현재 칼리피오리나엔터프라이즈 회장, GOOD 360 이사회 의장, 원 우먼 이니셔티브 설립


김민주 기자 vitma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