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창조 경제 시대, 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①

한경비즈니스가 기업가 정신을 창조 경제의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기획 취재 시리즈를 마련했다. 첫 순서로 창조 경제의 모태가 되는 기업가 정신을 개괄한다. 이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창업자들과 발상지를 찾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독일· 핀란드· 이스라엘 등 주요 혁신 강국을 차례로 방문해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지면에 담을 예정이다.
[SPECIAL REPORT] 한국 경제의 동맥경화, 기업가 정신으로 풀어라
지난 2월 25일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정확히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취임 초부터 불거졌던 복지 이슈·경제 민주화 정책 등 공약 후퇴 논란을 아직 매듭짓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정부 출범 1년을 맞은 이날만큼은 비장한 각오로 장밋빛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른바 ‘경제 대도약(Quantum Jump)을 위한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춘추관 기자회견장을 직접 찾아 담화문 형식으로 3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투자와 규제 완화, 처우 개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경제 계획의 핵심은 ‘제2의 벤처 붐’, 즉 창업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0년대 초반 한국 경제에 돌풍을 일으켰던 ‘닷컴 붐’을 재현하겠다는 의지다. 이를 위해 2017년까지 4조 원을 투입하고 엔젤 투자금에 대해서는 1500만 원까지 3년간 전액 소득공제 혜택을 주기로 했다.

정부가 벤처 창업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기업의 활동이 국가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인 ‘창조 경제’ 역시 바탕은 새로운 기업의 탄생에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건설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집단도 바로 기업들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기업 생태계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 노출돼 있는 게 사실이다. 대기업 쏠림 현상은 차치하고라도 이들 기업의 연령 자체가 높아지고 있다는 게 당면한 문제다. 반면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젊은 피’인 신생 기업 수는 오히려 줄고 있다. 설사 새로 창업하는 기업이 있다고 해도 끝까지 생존하는 비율마저 뚝뚝 떨어지고 있다. ‘한 번 실패하면 모든 게 끝’이라는 현실 앞에서 ‘기업가 정신’을 요구하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물론 창업의 역사가 오래됐다고 기업의 체질까지 늙어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새로운 기업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신산업군의 성장이 더디다는 점이다. 실제로 1990년 한국의 5대 수출 주력 산업은 ‘반도체·자동차·선박·무선통신·컴퓨터’였다. 그런데 지난해를 기준으로 한 5대 수출 주력 산업은 24년 전과 비교해 ‘컴퓨터’가 ‘석유화학’으로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다. 10대 수출 품목 중 2000년대 들어 새로 들어온 품목은 평판 디스플레이(2006년)와 자동차 부품(2003년)이 유일하다. 그나마도 기존 대기업이 생산하는 품목들이다.


위기의 한국 “기업가 정신 사라졌다”
대기업도 출발은 중소기업이었다. 특히 세계 최고의 빈곤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한국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다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창업주와 임직원들의 뼈를 깎는 도전 정신, 즉 기업가 정신을 빼놓고선 설명이 불가능하다. 자본·기술·인프라·경험 등 어느 것 하나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을 일군 것은 기업가 정신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생생히 증명한다.

하지만 한국 특유의 기업가 정신은 지난 20년간 점차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대우그룹·웅진그룹·STX그룹·팬택 등을 비롯해 신생 기업이 대기업으로 안착한 사례를 찾아보긴 쉽지 않다. 그 사이 외국에선 구글·페이스북·트위터·테슬라 같은 벤처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어떨까. 소규모 창업에 나선 자영업자까지 포함해 신생 기업이 창업 2년 뒤에도 생존할 확률은 50% 이하다. 5년 후에는 30% 수준으로 뚝 떨어진다. 잘 되는 기업도 새로운 투자에 나서길 꺼리는 건 매한가지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소수의 톱 플레이어들을 제외하면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혁명적 투자에 나서는 기업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평균 임기가 채 3년이 안 되는 현실에서 대규모 투자와 혁신에 나설 인물을 바라는 건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렵다.


특수 누리는 가업 승계 포기 컨설팅
기업을 키우고 싶어도 제도적 허점이 발목을 잡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가업 승계’다. 중소기업중앙회 가업승계지원센터가 2월 17일 발표한 ‘가업 승계 실태 조사’에 따르면 설문 대상 중소기업 경영자 150명 중 ‘자녀나 친족에게 가업을 승계하겠다’고 답한 비율이 63.4%로 나타났다. 2년 전인 2011년에는 88.9%에 이르렀던 것이 2012년에는 76.7%로, 급기야 작년에는 60% 초반대로 떨어졌다. 반면 ‘누구에게 승계할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답변은 2011년 6.7%에서 해마다 상승해 2013년에는 33.3%까지 치솟았다.

‘가업 승계 시 가장 큰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는 71.7%가 ‘상속·증여세’를 꼽았다. 상속세 공제 대상이 연 매출 2000억 원 미만에서 3000억 원 미만으로 확대됐지만 실제 현장에선 까다로운 공제 여건 때문에 세금 혜택을 받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그 덕분에 로펌과 회계법인에서 가업 승계 컨설팅 대신 ‘가업 승계 포기 컨설팅’으로 더 큰돈을 벌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SPECIAL REPORT] 한국 경제의 동맥경화, 기업가 정신으로 풀어라
기업가 정신 지수를 살펴봐도 우리의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로벌 기업가 정신 연구(GEM:Global Entrepreneurship Monitor)’는 미국 밥슨 칼리지(Babson College)와 영국 런던 비즈니스스쿨의 주도로 전 세계 69개국이 참여하는 글로벌 기업가 정신 지수 조사다. 매년 발표하는 자료 중 최신판인 ‘GEM 2012’를 보면 한국의 기업가 정신 지수가 처한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2012년 초기 기업가 활동 비율(TEA)은 6.6% 수준으로, 유사한 소득수준의 나라들과 비교할 때 낮게 나타났다. TEA는 18~64세 인구 중 초기 기업가 혹은 신규 사업을 수행하는 기업가의 비율을 말한다. 2001년의 12.3%와 비교해 보면 13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조사를 통해 드러난 더 큰 문제는 18~24세 청년층의 TEA 비율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같은 연령대 구간에서 23개 혁신 주도형 국가의 TEA는 평균 10%인 데 비해 한국은 2.3%에 불과했다. 상대적으로 많은 대학 재학 인력과 군 복무자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현저한 차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창업 의지를 꺾는 주요 요인이다. 실제로 같은 조사에서 ‘창업 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응답자의 비율은 40.4%에 달했다. 2010년에는 34.3%, 2011년엔 39.6%로, 해가 바뀔수록 창업 실패와 그에 따른 후유증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SPECIAL REPORT] 한국 경제의 동맥경화, 기업가 정신으로 풀어라
우리와 비교되는 경쟁국들은 어떨까. 혁신과 벤처의 상징으로 불리는 미국 실리콘밸리 사례를 보면 기업가 정신의 고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다. 실리콘밸리는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반도 초입에 자리한 샌타클래라 일대의 첨단 기술 단지를 말한다. 길이 48km, 너비 16km의 띠 모양 땅은 캘리포니아 주 전체 면적의 1.22%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업 활동과 관련된 지표들은 다르다. 일자리는 주 전체의 13.1%를 차지하고 기업공개 건수는 55.8%에 이른다. 기업 인수·합병(M&A) 건수는 43.0%, 특허 등록 건수는 51.8%, 벤처캐피털 규모는 77.2%, 엔젤 투자 규모는 무려 86.7%다. 주 면적의 1%에 불과한 작은 단지가 전체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평균 연봉은 10만7395달러(1억1500만 원)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벤처 열기 타고 저만치 달아나는 경쟁국
당장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도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책적·제도적 인프라는 얼마든지 연구할 가치가 있다. 우선 투자를 보자. 현재 실리콘밸리는 미국 벤처캐피털의 40%가 몰려 있을 정도로 벤처기업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투자 환경이 잘 조성돼 있다. 특히 갓 태어난 신생 기업에 대한 엔젤 투자가 활발해 가능성 있는 중소기업이 초기 현금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을 넘는 데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 벤처연구센터에 따르면 2012년 미국의 엔젤 투자 규모는 229억 달러에 이르고 이를 통해 27만500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됐다고 한다. 엔젤 투자 기업들은 해당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 외에도 창업의 전 과정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등 경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창업 초기 기업을 인큐베이팅하는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 기업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실리콘밸리에는 유명한 벤처 투자자 폴 그레이엄이 설립한 와이컴비네이터(Y-Combinator)를 비롯해 500스타트업(500Startups), 테크스타(Tech Star) 같은 액셀러레이터들이 200여 개 이상 활동하고 있다. 아이디어의 사업화, 초기 투자, 멘토링, 행정·법률 지원, 외부 투자자와의 연계 등 기업 창업과 성장을 위한 모든 지원이 액셀러레이터의 역할이다. 영국은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해 만든 국립과학기술예산재단을 통해 스타트업 팩토리라는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연구·개발(R&D) 지원도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직간접적으로 돕고 있다. 2014년 미국 정부의 R&D 예산은 1427억 달러에 이르는데, 정부 기관의 직접 연구는 물론 대학과 기업에도 상당한 R&D 자금이 지원되고 있다. 실리콘밸리 주변의 스탠퍼드·버클리대와 국립 로렌스버클리연구소 등 학계는 모두 정부의 R&D 예산으로 수준 높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R&D를 지원하는 특화 프로그램인 SBIR(Small Business Innovation Research)도 있다. 한 해 동안 1억 달러 이상의 외부 R&D 예산을 가지고 있는 정부 부처·기관의 경우 전체 예산의 2.5%는 무조건 SBIR에 배정해야 한다. 현재 해당 부처는 11개에 달한다. 반면 한국의 창업 자금 조달 환경은 여전히 투자보다 융자 중심이다. 중소기업의 자금 조달 역시 총액의 99%를 융자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 잉크매거진 편집장인 조지 젠드론이 경영학의 시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에게 물었다. “기업가 정신 발휘에서 세계 최고는 역시 미국 아닙니까?” 드러커의 대답은 이랬다. “그렇지 않아요. 세계 제1은 의문의 여지없이 한국입니다(Next Society, 피터 드러커).” 한국의 수출은 1964년 1억 달러에서 2011년 5000억 달러를 넘었다. 이 정도의 경제성장을 창출한 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한국 기업인들의 기업가 정신이 없었더라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