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웃는 시간 22시간에 불과…마음 맞을 때 웃음은 인간의 본능

주나라 유왕이 총애하던 포사(褒 )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한 번은 왕이 봉화를 올려 신하들을 불렀다. 신하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외적이 침입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낭패하여 돌아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포사가 비로소 깔깔 웃었다. 재미를 붙인 왕이 걸핏하면 봉화를 올리는 바람에 막상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아무도 오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는 얘기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의 주나라 버전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 세 천사가 찾아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사라가 곧 아이를 가질 것이다!” 100세의 아브라함과 아흔 살의 사라는 불경스럽게도 이 말을 웃어넘겼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됐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이삭이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이처럼 신·구약을 막론하고 웃음이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가 드물다. 신약에도 ‘슬픈 예수’는 있어도 ‘웃는 예수’는 없다.


어른은 하루에 열 번도 웃지 않아
예로부터 ‘잘 웃는 사람은 헤프다’고 하며 ‘웃음을 팔다’, ‘남의 웃음을 사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상황은 비슷했던 모양이다. 작자 미상의 이런 시조가 전해 온다.
“가만히 웃자 하니 소인의 행실이요 / 허허허 웃자 하니 남 요란히 여길 세라 / 웃음도 시비 많으니 잠깐 참아 보리라.”

웃음이 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나면서부터 웃기 시작한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도 본능적으로 웃을 줄 안다고 한다. 타인의 웃음을 보고 따라 배운다는 모방 학습설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침팬지 같은 영장류에게는 없는 섬세한 표정 근육과 웃음을 맡은 근육을 따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다지 많이 웃지 않는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일생을 80세로 볼 때 26년은 잠을 자고 21년은 일을 하지만 웃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22시간에 불과하다. 일생 동안 만 하루의 시간도 웃지 않는다니 좀 너무하다. 특히 어린이들은 하루에 수백 번씩 웃는데 비해 어른들은 하루에 열 번도 웃지 않는다고 한다. 웃음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면역 효과를 확실히 높여준다는데 사람들이 왜 이리 웃음에 인색한지 모르겠다.

소설 ‘삼국지’에는 웃는 장면이 그래도 제법 나온다. 전투나 전쟁에서 이겼을 때는 당연히 크게 웃고 승리의 만세를 부르며 환호작약했다. 끼리끼리 서로 마음이 맞을 때 나오는 웃음은 인지상정이다. 유비·관우·장비 세 사람은 처음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다. 복사꽃 피는 정원에서 동고동락을 맹세하며 의형제가 되기로 결의하는 그들한테서 웃음꽃이 만발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서로 견제하던 제갈량과 주유는 그동안의 과열 경쟁으로 생긴 불미스러운 일도 사과할 겸 파티를 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자리를 옮겨 독대한 둘은 이번 전투를 어떻게 치를지 논의했다.

“우리 서로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계책을 붓으로 각자의 손바닥에 쓴 뒤에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소?”

공명과 주유의 손바닥에는 똑같이 불 화(火)자가 적혀 있었다. 둘은 흡족하여 크게 웃으며 전투가 끝날 때까지 비밀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전쟁터에서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오만한 웃음과 함께 자의적인 판단을 하여 일을 그르친 경우도 있다. 제갈공명은 위나라 사마의가 가정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진군할 것이라고 예감했다. 가정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공명은 가정에 마속과 왕평을 출정시켰다. 일이 꼬이느라고 그랬는지 뜻밖에도 충성스러운 장수 마속이 어깃장을 부렸다. 부장(副將)인 왕평이 따졌다. “승상께서 평지에 진을 치라고 하셨는데, 어찌 산꼭대기에 치려고 하십니까?”

마속이 껄껄 웃으며 큰소리쳤다.

“현장을 잘 모르는 승상의 탁상공론일세. 걱정 말게!”

마속의 호언장담은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공명은 격노했다. 인재가 귀한 촉나라의 딱한 사정을 모를 리 만무한 공명. 그러나 군율의 엄정함이 먼저였다. 공명은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벴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웃음에 헤펐던 조조의 최후
‘삼국지’에서 웃음과 관련된 최고의 에피소드는 조조가 연출한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대는 촉오 동맹군의 화공(火攻)에 호되게 당한다. 패주하는 조조군을 주유·정보·감녕·태사자·여몽 등의 오나라 군대가, 또 한편에서는 관우·장비·조자룡 등의 촉나라 군대가 파죽지세로 추격했다. 양자강에 자리한 적벽 지역을 겨우 빠져나온 조조 군대는 양림산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한숨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조조가 크게 웃었다.

“주유와 공명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구나. 마땅히 이 자리에 군사를 매복시켰어야지. 하하하.”

웃음이 그치기도 전에 우레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상산의 조자룡이 역적 조조를 기다린 지 오래다!”

너무 놀란 조조는 하마터면 낙마할 뻔했다.

혼비백산한 조조의 군대는 양림산에서 남서쪽으로 한참을 달아나 사자산 호로구라는 곳에 진을 쳤다. 당시 조조군의 퇴각로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적벽→양림산→호로구→화용→강릉→허도의 순서다. 호로구는 강릉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코스인 화용(華容)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조조가 다시 크게 웃었다.

“여기에 군사가 있었다면 우린 군사의 반을 잃었을 걸! 하하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장비의 군대가 조조 군대를 덮쳤다. 조조는 갑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도망쳤다.

조조의 세 번째 웃음은 화용의 방조파(放曹坡)라는 곳에서 나왔다. 물동이로 아예 들이붓듯이 내리는 장대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조조의 패잔병들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때도 어김없이(?) 관우의 군대가 조조군을 덮쳤다. 조조는 관우에게 “옛 정을 생각해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해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관우의 의석(義釋), 즉 ‘의로운 석방’이다. 의석이 이뤄진 방조파는 ‘조조를 풀어준 언덕’이라는 뜻이니 나관중의 소설가로서의 말장난이 도를 지나친 듯하다.

그런데 조조는 왜 그런 전멸에 가까운 절망적인 상황에서 웃어댔을까.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적벽에 입성해 천하 통일을 목전에 뒀다고 생각했던 조조는 아마도 악몽 같은 패배의 수치스러움을 의식에서 밀쳐내 무의식 저 아래로 밀어 넣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유나 공명을 오히려 어리석다고 깎아내림으로써 비참한 자신의 현실을 스스로 달래려고 했을지 모른다.

사족. 당시 조조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하는 유행가 가사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19세기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은 오늘날 현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조조는 현대 심리학의 이러한 연구 성과를 근 2000년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