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새해 첫날이면 필자는 유서를 쓴다. 자연히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한다. 사전적 의미로 생명은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 또는 ‘사물이 유지되는 일정한 기간’을 뜻한다. 생명은 존엄하다. 누구도 이 명제를 부인할 수 없다. 헌법에 생명권이나 생명의 존엄성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법으로 명시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하고 마땅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헌법재판소는 ‘선험적으로 인정되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고 석명(釋明)했다. 생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새해 첫날,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로마시대 평균수명은 25세
살아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속내를 담고 있다. 그 살아 있는 기간도 예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지금이야 환갑잔치를 벌이는 게 남세스러운 일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환갑까지 사는 일은 드물었다. 실제로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평균수명은 25세였다고 한다. 물론 영아 사망률이 높아 평균수명을 깎아내리긴 했겠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평균수명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인 더 롱 사이드 오브 더 포티스(in the wrong side of the forties)’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40대 후반’을 뜻하는 말이었다. 40대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산업혁명 시대 영국 런던 시민의 평균수명이 20세가 채 되지 못한 것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노동과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 특히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동원된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짧았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환경이 좋아지면서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 실제로 산업혁명 이후부터 의학·과학의 발달로 1년마다 약 3개월씩 수명을 연장시켰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평균수명은 40세 안팎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에는 52세, 1971년에는 62세, 2010년에는 79세로 증가했다. 텍사스대 노화연구팀은 현재의 사망률 1위를 차지하는 암이 퇴치되면 인간은 150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일찍이 190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러시아의 생물학자 엘리 메치니코프(Elie Metchnikoff, 1845~1916)는 인간이 충분하고 균형 잡힌 섭생과 적당한 운동을 지속하면 최대 120세까지 살 수 있다고 예측했고 최근 일본 이토추(伊藤忠) 그룹의 혁신기술팀에서는 2025년쯤 되면 120세까지 생명 연장이 가능하다고 예측했다.

파비엔 구-보디망(Fabienne Goux-Baudiment) 세계미래학회 회장은 “평균수명이 120세가 되는 2070년에는 평범한 사람도 평생에 결혼을 2~3번 이상 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장수(長壽) 사회가 결혼 패턴과 가족제도를 송두리째 바꿔 놓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120세까지 사는 게 행복한 일일까. 이제는 삶을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로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아무리 오래 산들 형편없는 질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찍이 부처는 ‘법구경’에서 100년의 삶이 하루 정진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생명의 의미는 길고 짧은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바르게 쓸 수 있는지 여부다. 부처는 마음속 욕망과 외적인 변화에 장악되는 사람은 100년을 살아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는 제자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공자가 자로에게 그렇게 대답한 것은 자신의 머리 좋음을 믿고 공부에 매진하는 데 소홀한 따끔한 질책도 포함돼 있다.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어찌하여 죽음까지 알려고 하느냐며 차근차근 공부하라는 가르침이다.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는 타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공자는 죽음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보다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는 데 먼저 열중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런 점에서 공자는 죽음보다 삶을 중시하는, 혹은 더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앎은 삶의 끊임없는 추구여야 한다고 믿는 공자는 오죽하면 “아침에 도를 알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했을까.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마지막에 죽는다.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삶이 인간의 바람과 상관없이 시작된 것처럼 죽음도 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다가온다. 죽음은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생명 활동이 정지돼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상태이며 삶의 종말을 의미한다.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멈추는 것이며 뇌가 작용하지 않는 상태다. 그에 따라 죽음의 판정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큰 바탕의 얼개는 다르지 않다. 문제의 중심에는 심장 등 여러 장기의 이식 문제가 관련되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얼굴
죽음은 슬프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여기는데 죽음은 그 개똥밭에서 구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니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그러니 슬프다. 하지만 죽음은 정말 슬픈 것일까. 엄밀히 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어떻다 말할 수는 없다.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경험한,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사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남은 이들이 죽은 이와의 관계를 상실한 데에 대한 슬픔이다.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도 느낌이 다르다. 부모의 도움이 여전히 필요한 상태에서의 죽음은 자신의 어려운 독립과 고난을 의미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그러한 상태의 자신에 대한 슬픔이다.

물론 다시는 부모를 뵐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근원적이다. 그러나 자기가 완전히 성장하고 부모도 어느 정도 천수를 누렸거나 치매처럼 가족들에게 힘든 부담을 오랫동안 준 부모의 죽음은 분명 덜 슬프다. 어린 상주는 문상객도 울컥하게 만들지만 천수를 누린 부모를 잃은 상주에게는 호상(好喪)이라며 위로한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느낌은 다르게 다가온다.

평생을 죽음에 대한 연구에 힘써 ‘죽음학’을 세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의 죽음’에서 임종 환자들의 심리적 변화를 5단계로 나누면서 신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의 변화를 설명했다.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덜 인간다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더 인간다워지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종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는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마련된다. 모든 종교는 죽음을 핵심의 주제로 삼는다. 철학도 죽음의 문제를 다루지만 종교처럼 죽음 이후에 대해 다루지는 않는다. 유교가 종교가 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자로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에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未能事人 焉能事鬼)?”
죽음의 문제는 회피해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다. 물론 죽음조차 철학적 성찰을 통해 초연하게 극복하려는 사람도 있다. 바로 장자(莊子, 기원전 369~289) 같은 사람이다.

“삶은 죽음의 길을 따르는 것이요,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니, 어찌 그 근본 이유를 알 수 있으리오. 사람의 삶이란 기의 모임이니, 기가 모이면 곧 살아 있는 것이요 기가 흩어지면 곧 죽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뒤따르는 것이라면, 나는 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죽음 앞에 애써 의연하려는 것도 어쩌면 위선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 두려움의 다른 표현일 뿐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 삶을 제약하고 제한하는 기능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삶을 충만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충실한 삶을 위해 우리는 죽음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혹은 남들이 바라는 삶을 살고 있는가, 또는 그들이 명하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다.

죽음이 삶을 제약하고 제한하는 기능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충만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죽음에 대한 오해를 벗어나게 해준다.

“사는 방법은 일생을 통해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겠지만 아마도 사는 것 이상으로 평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죽는 일이다. 우리가 타고난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짧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인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도 알맞게 잘 쓰는 사람에게 그 폭이 두드러지게 넓어지는 것이다.”
세네카(Seneca, 기원전 4~서기 65)의 말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