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毒殺) 코드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 덴마크 국왕 클로디어스는 햄릿의 숙부다. 그는 친형을 독살하고 왕위를 찬탈한데 이어 형수인 거트루드 왕비까지 차지했다. 사건 자체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왕자 햄릿에게 원한이 맺힌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난다. 부왕은 아들에게 복수를 요구한다. “친형인 나를 독살한 너의 삼촌을 제거해 나의 한을 풀어다오!” 한편 그리스신화에서 메데이아는 사랑하는 남편 이아손을 위해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동생까지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고 코린토스로 망명한다. 그런데도 배은망덕한 남편이 코린토스의 공주와 결혼하려고 하자 그녀는 공주를 독살한다.
[문화 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약자의 칼’로 불린 가장 효과적 암살 수단
문학이나 신화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역사에도 독살의 사례는 많다. 청소년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독미나리가 든 독배를 들고 죽은 소크라테스가 먼저 떠오른다. 권력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동서양의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아그리피나와 측천무후가 주인공이다. 로마의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 네로를 황제에 앉히기 위해 삼촌이자 새 남편인 클라디우스 황제를 독살한다. 당나라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도 남편 고종과 내연의 관계였던 친정 언니를 독살한다. 고종 사후에는 황위 계승자인 자기 친아들 이홍까지 독살한 뒤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잡고 40여 년간 독재정치를 주도한다.


간단한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
독살은 특정인을 암살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독(poison)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원전부터 범죄자를 처형하는 수단이었고 타살은 물론 자살의 도구였다. 독살은 간단한 화학 지식과 활용 방법만 익히면 누구나 손쉽게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사람도 남몰래 죽일 수 있다. 그래서 ‘약자의 칼’로 불렸다.

‘삼국지’에 어찌 독살 이야기가 빠지랴. 후한의 제12대 황제인 영제(靈帝)가 죽고 정국은 대혼란에 빠진다. 장남 유변(劉辯)과 차남 유협(劉協) 등 이복형제 사이에 황위 계승을 두고 심각한 갈등이 생긴 것이다. 결국 영제의 정실인 하왕후의 아들 유변이 제13대 소제(少帝)가 된다. 후유증은 컸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자신의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는데 성공한 하왕후와 그의 오라비 대장군 하진은 라이벌 유협을 민 사람들을 대거 숙청한다. 유협의 생모이자 영제의 첩실 왕미인부터 독살한다. 영제의 생모이자 유변·유협 형제의 할머니인 동태후도 유협을 밀었다는 이유로 독살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다. 소제가 등극한 지 오래지 않아 외숙부 하진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 틈을 타 수도 낙양을 점령한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차남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다. 쫓겨난 소제는 반동탁 연합군에게 이용당할 것을 두려워한 동탁이 독살했다.
[문화 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약자의 칼’로 불린 가장 효과적 암살 수단
하진에 이어 실권을 잡은 동탁이 여포의 손에 죽고 동탁의 잔당인 이각과 곽사의 무리에게 쫓기던 헌제는 조조에게 몸을 의탁한다. ‘한나라판 아관파천’이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조선의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옮겨갔다. 주권을 러시아에 넘긴 것이나 진배없었다. 마찬가지다. 문무백관을 이끌고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로 수도를 옮겨간 황제가 실권이 있겠는가. 조조는 허울뿐인 천자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게 됐다. 멋대로 국정을 농단하게 된 조조는 신발을 신고 내전에 오르고 황제 앞에서도 칼을 차고 다니는 등 방약무인했다.

헌제는 아내 복황후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마침내 헌제는 할머니 동태후의 동생인 동승에게 혈조(血詔), 즉 친히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쓴 조서를 내린다. “충의열사를 규합하여 조조를 죽이라.” 동승은 헌제의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던 태의(太醫) 길평과 의논하여 조조의 두통을 치료하는 체하며 독살하기로 모의한다. 그런데 꼭 적은 내부에 있다. 동승의 하인 진경동이 동승의 시첩과 통정하다가 들켜 처벌을 받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진경동의 고발로 조조를 주살하려던 모의는 사전에 발각됐다. 또 한 번 피바람이 일었다. 임신 중이던 헌제의 첩이자 동승의 딸인 동귀인마저 헌제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살해되는 등 관련자들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심리학자나 범죄 심리를 연구하는 프로파일러에 따르면 독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냉정하고 차분하다. 교활하고 머리도 좋아 창의적인 사람도 있다고 한다. 독살은 우발적·충동적인 살인이 아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동승과 길평의 조조 독살 모의처럼 사전에 치밀하게 각본을 짠 기획 살인이 대부분이다. 독살자는 대체로 감정이 억눌린 상태에 있으며 도덕관념도 희박하다. 상대방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즐기는 사이코 패스들도 있다고 한다. 작가 나관중은 소설 ‘삼국지’에서 하진과 동탁, 조조를 이런 부류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항상 검식관을 대동하는 푸틴 대통령
독살의 동기도 돈 문제, 애정 문제에서 원한에 의한 복수, 정치적인 암살이나 테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삼국지는 특성상 대개 정치적인 권력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암살을 주로 다루고 있다. 독살하거나 사주하는 사람은 대개 피살자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다. 권력투쟁 등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치정에 얽힌 남녀들이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고 시종·요리사·환관·집사·가정부에서 주치의나 간호사 등이 대리인이나 공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많다. 조조의 독살을 사주한 헌제나 이를 집행하고자 했던 동승과 길평의 사례도 그렇다.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뭣하지만, 사실 독살과 관련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흥미진진한 뒷얘기들이 많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후 정부(情婦)의 남편에 의해 독살됐을 것이라는 풍문, 악성 모차르트가 궁정 악단장 살리에르 혹은 프리메이슨에게 독살됐다는 음모론, 조선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데 이어 아들 사도세자도 독살했다”는 당대 사람들의 믿음은 아쉽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검증하기 어렵다. 예외도 있다. 청나라 말기 비운의 황제인 광서제는 정사에는 병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최근 중국 정부 차원에서 사인 조사를 위해 부검한 결과 비상(砒霜)에 의한 독살로 밝혀졌다. 그를 황제의 자리에 앉혀 준 주역이자 정적이기도 했던 이모 서태후가 유력한 배후로 지목되고 있지만 그것까지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사후 100여 년이 지나 정확한 사인이 밝혀진 저승의 광서제는 원통함이 조금은 풀렸으려나?



사족: 보도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독살에 대해 거의 편집증적인 공포가 있다. 식사 때마다 검식관이 모든 접시를 검사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도 음식물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고 한다. 얼마 전 중국에서는 세계를 뒤흔든 희대의 독살 사건이 일어났다. 전 충칭시 당서기인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가 연인 관계였던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호텔로 유인해 술을 마시고 만취한 닐의 입에 독약을 부어 살해한 것이다. 권력과 치정(癡情)이 얽힌 독살의 전형이다. 독살은 결코 신화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현실인 것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