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분야 전문가 중용…정책 결정은 토론 통해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별명은 ‘수첩공주’다. 메모광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배운 습관 때문이다. 2인자를 키우지 않는 인사 스타일도 아버지와 닮은꼴이다. 박 당선인은 20대 때 5년 2개월간 청와대에서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했다. 밥상머리에서 혹은 차를 타고 정책 현장에 가면서 아버지에게서 국정 철학과 리더십을 듣고 배웠다. 살아있는 제왕학 교육이다. ‘박정희 리더십’을 알면 박근혜 시대 5년을 엿볼 수 있다.
박근혜 시대를 읽는 핵심 키워드 ‘박정희 리더십’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단순한 아버지 그 이상이다. 1997년 정계에 입문한 박 당선인이 첫 연설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것도 바로 아버지인 박 전 대통령이었다.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던 그해 12월 박 당선인은 18년 칩거 생활을 접고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입당한 다음 날 청주 중앙공원에서 열린 이회창 후보 거리 유세에 연사로 처음 나선 박 당선인은 “1960, 1970년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과 같은 난국에 처한 걸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생각이 나 목이 멘다”며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기여하는 게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해 대선은 이회창 후보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이듬해 재·보선에 당선돼 국회에 진출했고 15년 뒤 한국 첫 부녀(父女) 대통령으로 청와대의 새 주인이 됐다.

최근 김용준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박 당선인의 ‘수첩 인사’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박 당선인은 어디를 가든 항상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꼼꼼하게 메모해 언제부턴가 ‘수첩 공주’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수첩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따라 읽기만 한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담겨 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낙하산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박 당선인의 수첩의 유래를 박 전 대통령의 ‘엔마초’에서 찾았다.

“일본말로 ‘엔마초’라는 게 있는데 박 대통령의 엔마초가 당시 정관계에서 유명했다. 교사의 수첩과 같은 건데 일종의 비망록이다. (언론사 논설위원들과의 술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 인척 문제를 직언했는데) 그날 나에 대한 인상이 엔마초에 올라갔다. 그리고 한참 지난 1979년 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나를 찍어 정치에 참여하게 했다. 박근혜 당선인을 비하하는 의미로 ‘수첩공주’ 운운하는데 그건 박정희 대통령의 엔마초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하고 있다.”
<YONHAP PHOTO-0230> Park Geun-hye (L) uses a writing brush to write calligraphy as her father, the late South Korean President Park Chung-hee, looks on in Seoul in this August 31, 1977 picture which Reuters obtained August 27, 2012. Park Geun-hye was picked as the presidential candidate of the ruling conservative and right-wing Saenuri Party on August 20, 2012. Park is the daughter of former military dictator Park Chung-hee who took power in a military coup in 1961 and ruled until his assassination in 1979. Park's frugal lifestyle as a single woman living in a modest house in the capital Seoul, her simple clothes and 1970s hairstyle recall the look and life of her mother, Yuk Young-soo. Picture taken August 31, 1977. To match Feature KOREA-POLITICS/PARK REUTERS/The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Handout (SOUTH KOREA - Tags: POLITICS) FOR EDITORIAL USE ONLY. NOT FOR SALE FOR MARKETING OR ADVERTISING CAMPAIGNS. THIS IMAGE HAS BEEN SUPPLIED BY A THIRD PARTY. IT IS DISTRIBUTED, EXACTLY AS RECEIVED BY REUTERS, AS A SERVICE TO CLIENTS/2012-08-29 06:59:44/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Park Geun-hye (L) uses a writing brush to write calligraphy as her father, the late South Korean President Park Chung-hee, looks on in Seoul in this August 31, 1977 picture which Reuters obtained August 27, 2012. Park Geun-hye was picked as the presidential candidate of the ruling conservative and right-wing Saenuri Party on August 20, 2012. Park is the daughter of former military dictator Park Chung-hee who took power in a military coup in 1961 and ruled until his assassination in 1979. Park's frugal lifestyle as a single woman living in a modest house in the capital Seoul, her simple clothes and 1970s hairstyle recall the look and life of her mother, Yuk Young-soo. Picture taken August 31, 1977. To match Feature KOREA-POLITICS/PARK REUTERS/The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Handout (SOUTH KOREA - Tags: POLITICS) FOR EDITORIAL USE ONLY. NOT FOR SALE FOR MARKETING OR ADVERTISING CAMPAIGNS. THIS IMAGE HAS BEEN SUPPLIED BY A THIRD PARTY. IT IS DISTRIBUTED, EXACTLY AS RECEIVED BY REUTERS, AS A SERVICE TO CLIENTS/2012-08-29 06:59:44/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박근혜 시대를 읽는 핵심 키워드 ‘박정희 리더십’
박 당선인은 박 전 대통령을 항상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을 객관화해 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공적인 관심과 사적인 관심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박 당선인은 어머니가 숨진 1974년 8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만 5년 2개월을 퍼스트레이디로 살았다. 이 기간 동안 밥상머리에서, 차 타고 정책 현장에 가면서 아버지에게서 국정 철학과 리더십을 듣고 배웠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리더십이 같을 수는 없다.

경제 규모도 커지고 사회도 다원화됐다. 박 전 대통령은 18년 동안 장기 집권했지만 박 당선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5년이다. 박 당선인도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도자가 가는 길에서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하셨다. 국가 지도자는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자기가 바르지 않고는 나라를 이끌 수 없다고 하셨다. 다음에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셋째, 어려운 국민을 챙기고 돌봐야 한다. 그 시대와 21세기의 경제 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경제 규모도 엄청 달라졌다. 그러나 사심 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일이다. 본받고 싶다.”

어쨌든 ‘박정희 리더십’은 박 당선인의 출발점이다. 그가 계승을 선택하든 극복을 선택하든 마찬가지다.

박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경제 개발이다. 하지만 집권 초기 그는 경제 문외한에 가까웠다. ‘혁명 공약’에 적혀 있듯이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개혁 의지는 충천했지만 경제에 대한 전문적인 안목이나 식견은 일천했다. 초기 경제정책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 자료-1
    (서울=연합뉴스) 26일 오전 신현확 전 국무총리가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사진은 78년 12월 신임 부총리에 임명된 신부총리가 남덕우 전 부총리와 중앙청사를 나서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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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 전 국무총리 자료-1 (서울=연합뉴스) 26일 오전 신현확 전 국무총리가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사진은 78년 12월 신임 부총리에 임명된 신부총리가 남덕우 전 부총리와 중앙청사를 나서는 모습. (끝)
일 잘하는 사람 오래 쓴다

1962년 단행된 통화 개혁이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시중에 돌고 있는 화교 자금과 검은돈을 끌어내 경제 개발 자금을 충당한다는 어설픈 아이디어를 낸 군인 몇 사람이 한국은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가 엄청난 부작용만 낳은 채 한 달 만에 백지화됐다. 제1차 5개년 계획도 의욕만 앞섰다. 220개나 되는 사업을 다 하겠다고 나섰다. 자금 지원 요청을 위해 방문한 세계은행에선 “돈도 없는데 어떻게 그 많은 사업을 할 거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성장률 목표는 7.1%였다. 비현실적인 수치였다. 1차연도인 1962년 성장률이 2.2%를 기록하자 박 전 대통령의 좌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실패에서 배웠다. 전환점은 1964년이다. 경제정책의 무게중심을 수입 대체에서 수출로 옮겼다. ‘수출 제일주의’를 새로운 국시로 내걸었다. 인사 스타일도 달라졌다. 경제 분야는 전문가를 발탁해 쓰고 성과를 내면 오랫동안 중용했다.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언론인으로 변신했던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하고 경제정책의 총지휘권을 부여했다. 1961년 창설된 경제기획원은 1964년 5월까지 2년 10개월 동안 무려 7명이나 장관이 바뀌었다. 평균 재임 기간이 5개월도 못 된다. 하지만 장 부총리는 박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3년 5개월간 근무했다.

박 전 대통령의 경제 용인술의 결정판은 남덕우 전 총리와 김정렴 전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정부 평가 교수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남덕우 당시 서강대 교수를 눈여겨봤던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그를 재무 장관으로 영입했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주던 날 박 전 대통령은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고 해 주위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1974년까지 재무 장관을 지낸 남 전 총리는 이후 1978년까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재무 장관 5년에 기획원 장관 4년을 기용하고도 박 전 대통령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978년 말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를 8일 만에 다시 불러 대통령 경제특보에 앉혔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1970년대 사실상 ‘경제 대통령’ 역할을 했다. 재무 장관과 상공 장관을 두루 거치는 동안 그는 박 전 대통령의 머릿속에 이미 점지돼 있었다. 1969년 박 전 대통령은 그를 비서실장에 앉히고 정부 직제와 관계없이 경제의 총괄적인 관리를 전적으로 맡겼다. 박 전 대통령은 임명장을 주면서 “나는 국방과 외교 안보에 몰두할 테니 경제는 당신이 맡아 달라”고 말했다. 그때 만 해도 김 전 비서실장은 자신이 9년 2개월간 장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경제 사령탑을 거친 사람은 모두 7명에 불과하다. 장기영·박충훈·김학렬·태완선·남덕우·신혁환 그리고 김정렴 비서실장이 그들이다. 철저한 소수정예주의다.

박 전 대통령은 상대방을 사로잡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갖고 있다. 하나는 담배를 권하는 소탈한 대통령의 모습이다. 박 전 대통령은 사람을 불러 앉히고 나면 일단 담배부터 권한다. 담배를 받아 들면 곧바로 라이터로 불을 댕겨 턱밑에 갖다 댄다. 또 하나는 대통령의 눈빛이다. 얼굴이 검고 체구가 작은 박 전 대통령은 화가 나면 얼굴이 더 검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작은 눈에서 뿜어 나오는 눈빛은 푸른빛이 도는 검광처럼 서늘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두 가지 대조적인 모습을 적절히 보임으로써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곳에 앉히고야 말았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데려다 앉히고 나면 다시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이라는 고전적 용인술을 통해 그 사람의 기능과 역할을 적절히 통제했다. 핵심은 어느 한 측근이 전횡하지 못하도록 비슷한 실력자들에게 권한을 나눠주고 서로 견제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경제 부문은 예외였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은 상대를 마음대로 잡았다 놓았다 하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달인이었다. 아무리 측근이라도 눈 밖에 나면 과감하게 내치지만 버린 사람도 필요하면 다시 불러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연재기사(산업전략군단사.122회) - 오원철 1993.5.31게재 1971년9월20일 청와대 수출확대회의
연재기사(산업전략군단사.122회) - 오원철 1993.5.31게재 1971년9월20일 청와대 수출확대회의
브리핑 통해 의견 모으고 실력 검증

박 전 대통령은 타고난 ‘군인 스타일’이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주도한 오원철 전 경제수석은 “박 대통령은 중요한 일을 할 때면 군인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간단명료한 지시와 부연 설명이 없는 상명 하달, 치밀한 점검, 그리고 숨 돌릴 틈 없는 밀어붙이기 등이 핵심 요소다.

박 전 대통령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게 1965년부터 매달 열린 ‘수출 확대 회의(상공부)’와 ‘월간 경제 동향 보고 회의(경제기획원)’다. 수출 확대 회의는 일종의 수출 전략 회의이고 작전 회의였다. 사령관은 박 전 대통령 자신이다. 매월 수출 실적, 품목별 수출 실적, 나라별 수출 실적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계획, 신규 상품 계획이 모두 포함됐다. 애로 사항은 즉석에서 해결했다. 박 전 대통령은 첫 회부터 1979년 10월 비극적 최후를 맞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했다. 햇수로만 15년간이다.

회의 내용은 언론을 통해 모두 공개됐다. 비밀이 없었다. 정치계도 이해하고 학계도 이해하고 국민도 이해하고 동질화됐다. 개인이나 소속 단체의 이익을 떠나 오로지 수출과 경제 발전만 생각하는 회의였다. 자연히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힘’이 있었다. 처음에는 청와대에서 개최됐는데 참석 인원이 늘자 중앙청 대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참석 인원은 100명이 넘었다.

오 전 경제수석은 “수많은 회의를 통해 박 전 대통령 자신이 경제 관료 못지않은 전문가가 됐다”고 말했다. 회의는 오전 10시에 시작해 12시에 끝났다. 수출 확대 회의와 월간 경제 동향 보고 회의를 합하면 한 달에 4시간, 1년이면 48시간, 이렇게 15년간 했으니 박 전 대통령은 700여 시간이 넘는 실무 경제학 강의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자연히 어느 배석자 못지않게 경제 실무에 밝아질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통령은 구체적인 수치를 목표로 제시하길 좋아했다. 막연하게 ‘우리나라가 잘살기 위해서는 수출을 해야 한다’고 떠드는 것은 정치 구호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에는 ‘10억 달러 수출, 연간 40% 수출 증가율’을 내걸었다. 이 목표가 달성되면 보리밥을 먹을지언정 국민들의 생활고는 해결된다고 했다. 1970년대는 ‘100억 달러 수출’과 ‘연간 40% 수출 증가율’을 요구했다. 이를 달성하면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가 돼 국민들의 의식주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한국은 중화학공업 국가가 된다고 약속했다.
연재기사(산업전략군단사.163회) - 오원철 1993.10.26게재  병풍식브리핑차트. 73년 상공부가 자동차4사로부터 제출받은 사업계획서의 내용을 박정희대통령에게 간결하게 보고키위해 만들었다.
연재기사(산업전략군단사.163회) - 오원철 1993.10.26게재 병풍식브리핑차트. 73년 상공부가 자동차4사로부터 제출받은 사업계획서의 내용을 박정희대통령에게 간결하게 보고키위해 만들었다.
박정희 시대는 브리핑을 중시하는 ‘브리핑 행정 시대’이기도 했다. 각 부처에서 사업 계획을 수립해 대통령의 재가를 얻으려면 브리핑을 거쳐야 했다. 이 자리에는 총리 이하 각부 장관, 관계 기관장이 배석했다. 보통 국장급이 브리핑을 맡았지만 과장급이라도 그 분야의 권위자라면 직접 브리핑했다.

두 부처에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를 때는 같은 장소에서 제각기 브리핑을 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브리핑을 담당하는 공무원 간에 격론이 벌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박 전 대통령은 모든 의견을 다 듣고 최종 결단을 내린다. 어느 쪽도 불평할 수가 없다. 또 해당 부처 장관이 최종 결정하지 못한 채 브리핑을 할 때도 있다. 결론에서 A안과 B안을 내놓고 서로간의 장단점만 설명한다. 그러면 박 전 대통령은 “장관! 당신은 A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B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라고 호통을 쳤다. 장관은 책임 행정을 하라는 뜻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60년대 초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독대 자리에서 정책을 승인하는 일을 피했다. 인사는 장관에게 위임했지만 주무장관 얘기만 듣고 정책을 결정하지 않았다. 정책을 결정할 때는 꼭 관계 장관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장관들에게 자기주장을 말하게 하고 메모만 했다. 귀로 듣는 공부다. 그러다가 컨센서스가 이뤄지면 박 전 대통령이 결정을 내렸다.

황병태 전 의원은 브리핑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눈에 띄어 발탁됐다. 경제기획원 공공차관 과장이던 황 전 의원은 장기영 부총리의 지시로 월간 경제 동향 보고 회의에서 브리핑을 맡았다. 일개 중앙 부처 과장에 불과했지만 황 전 의원은 이를 계기로 박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었다. 필요한 일은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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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 버리고 실무자 의견 존중

경제 개발 계획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사업자가 선정됐다.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언제나 실무진의 의견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황 전 의원은 “청와대가 직접 사업자를 낙점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고 말했다. 이때 참여한 기업 가운데 일약 재벌 반열에 오른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통령으로서는 마음만 먹으면 큰 인심을 쓰지 않고도 주변 사람들을 재벌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한 발 물러서 실무진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줬다. 많은 독재국가에서 최고 권력자 주변의 측근들이 경제적 이권을 독차지해 말썽이 됐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971년 총포 분야 사업자로 선정된 풍산금속은 특이한 경우다. 당시 풍산금속은 경기도 부평에서 가정용 구리 제품을 만들어 내는 소규모 업체에 불과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갔지만 유찬우 회장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능력도 없고 흥미도 없다는 것이었다. 실무자들의 보고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유 회장이 서애 유성룡의 후손이라는 것을 안 박 전 대통령은 그를 불러 서애 선생이 임진왜란 시절 조정을 위해 활약한 것처럼 나라를 위해 역할을 해달라고 설득했다.
박근혜 시대를 읽는 핵심 키워드 ‘박정희 리더십’
<YONHAP PHOTO-0826> 선친 동상 앞에 선 박근혜
    (구미=연합뉴스) 이재혁 기자 = 한나라당 벅근혜 전 대표가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을 마친 뒤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2011.11.14
yij@yna.co.kr/2011-11-14 11:04:12/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선친 동상 앞에 선 박근혜 (구미=연합뉴스) 이재혁 기자 = 한나라당 벅근혜 전 대표가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을 마친 뒤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2011.11.14 yij@yna.co.kr/2011-11-14 11:04:12/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박 전 대통령은 신문에 게재되는 칼럼이나 기고를 유심히 읽고 발탁 인사에 참고했다. 남덕우를 재무 장관에, 김만제를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에 발탁할 때도 그들이 쓴 신문 칼럼을 읽고 주목해 왔었다. 매년 초 각 부처나 지방 초도순시, 수출 확대 회의 등도 인재 발탁의 중요한 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장차관이나 지방 장관, 담당 공무원들이 얼마나 자기 일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 눈여겨봐 뒀다가 인사에 반영했다. 박 전 대통령은 수출 확대 회의에서 발언했거나 청와대에 불러 식사했던 공무원들의 이름을 꼭 기억했다가 나중에 마주치면 격려해 줬다.

박정희 시대의 청와대는 두 조직으로 나누어졌다. 비서실 기구와 특별보좌관이 그것이다. 비서실은 각 부처의 우수한 공무원들이 파견 나와 2~3년씩 근무하다가 돌아갔다. 특보 조직에는 주로 각 분야 전문가들이 포진했다. 1970년 특보 제도가 신설되면서 사회 담당 특보로 임명된 임방현 전 의원은 첫날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받았다.

“청와대에서 나를 도와주기로 했는데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행정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잘 파악해 달라. 세 번째, 내가 일에 바쁘니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서적과 정기간행물 등을 보고 그때그때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요약해 꼭 내게 알려 달라.”



글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한국경제신문
참고 자료=‘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동서문화사, 2006년)’, ‘대통령의 경제학(기파랑, 2012년)’, ‘실록 박정희(중앙M&B, 1998년)’, ‘박정희 패러다임(조선뉴스프레스,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