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진화, 세계 공익재단 현장 보고서7 : 베텔스만 재단(Bertelsmann Stiftung)

독일 북서부 인구 9만 명의 조용하고 한적한 소도시 귀터슬로(Gutersloh)에는 유럽 최대 미디어그룹 베텔스만의 본사가 있다. 본사 사옥 건너편에는 고 라인하르트 몬 회장이 전후 독일 재건 과정이 한창이던 1977년 교육 관련 공익사업을 하기 위해 설립한 베텔스만 재단이 있다.

현재 재단은 교육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공익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독일 내 가장 대표적인 싱크탱크형 공익재단으로 자리 잡았다. 재단의 연구 결과와 각종 사업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정부와 미디어가 인용, 보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베텔스만 재단] 사회 발전 모델 적용해 보는 ‘실험실’
독일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기업들에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을 부과해 왔다. 통일 이전 서독 시절부터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chaft)라고 불리는 수정자본주의는 기업의 자유와 생산의 극대화를 추구하면서도 발생하는 부를 적절히 나누어 소외 계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임무가 강조됐다.

오늘날에도 독일의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을 위해 사회적 분담금을 내놓는 것부터 시작해 다양한 명목으로 사회적 기여를 해야 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독일의 몇몇 대기업의 오너들은 재단(Stiftung) 형태의 조직체를 설립해 공익사업을 기업과 독립적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독일에는 현재 다양한 분야에 관련한 7만여 개의 재단이 설립돼 있다.

독일의 기업재단은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 사업을 넘어 각종 사회문제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세련되고 높은 수준의 사회 참여를 추구했다. 그래서 독일의 일부 기업재단들은 하나의 싱크탱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독일의 자동차 회사가 설립한 ‘BMW헤르베르트콴트재단’, ‘폭스바겐 재단’, 튀센-크롭 철강회사가 설립한 ‘튀센재단’, 기계 제조사 보쉬가 설립한 ‘로베르트 보쉬재단’, 유럽의 종합 미디어 그룹 베텔스만그룹이 설립한 ‘베텔스만 재단’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 베텔스만 재단은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싱크탱크적인 속성이 특히 강한 곳이다.

베텔스만 재단은 차량이나 사람의 소통이 많지 않은 한적한 곳에 들어선 베텔스만그룹 본사 사옥과 마주하고 있다. 통유리로 된 건물과 바로 옆에 조성된 호수는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조화롭다. 사무실 어디서든 통유리를 통해 호수에서 떠다니는 거위 떼를 바라볼 수 있다. 마치 공원처럼 쾌적한 이런 공간에서 일한다면 왠지 더욱 창의적이고 선진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업무환경이었다.

베텔스만그룹
유럽 최대 복합 미디어 그룹이다. 1853년 몬(Mohn) 가문에 의해 설립된 베텔스만은 사업 초기에는 성경책 등 종교 서적 판매에 주력했으나 신문·잡지·음반·영화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 왔다. 국내에도 익숙한 출판사인 랜덤하우스를 포함해 유럽 최대 TV·라디오 방송사인 RTL그룹, 그루너+야르(Gruner+Jahr) 등이 있다. RTL은 150여 개국에서 유통망 및 프로그램 편성권을, 그루너+야르는 20여 개국에 280여 개의 신문·잡지 등 출판물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50개국에 10만여 명의 임직원을 두고 있다.
Die Herausforderungen der Globalisierung waren Thema beim Treffen von Liz Mohn und Aart De Geus mit Koreas Premierminister KIM Hwang-sik (3. v.l.) und Botschafter Hans-Ulrich Seidt. Im Rahmen ihrer Asienreise trafen Liz Mohn und der kuenftige Vorstandvorsitzende Aart de Geus auf den koreanischen Premierminister Kim Hwang-sik. Zahlreiche Gemeinsamkeiten schafften die Basis fuer eine weitergehende Zusammenarbeit in den naechsten Jahren.
Die Herausforderungen der Globalisierung waren Thema beim Treffen von Liz Mohn und Aart De Geus mit Koreas Premierminister KIM Hwang-sik (3. v.l.) und Botschafter Hans-Ulrich Seidt. Im Rahmen ihrer Asienreise trafen Liz Mohn und der kuenftige Vorstandvorsitzende Aart de Geus auf den koreanischen Premierminister Kim Hwang-sik. Zahlreiche Gemeinsamkeiten schafften die Basis fuer eine weitergehende Zusammenarbeit in den naechsten Jahren.
지한파 연구원의 환대

베텔스만 재단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온 기자를 반갑게 맞아 준 이들은 베텔스만 재단의 홍보를 담당하는 레지나 코너 수석 부이사장과 로버트 슈와츠 프로젝트 매니저였다. 코너 부이사장은 전직 언론인 출신으로 세련되고 능숙한 태도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리고 특히 방문 전부터 기대가 됐던 만남이 바로 슈와츠 매니저였다. 취재를 요청한 후 며칠이 지나 슈와츠 매니저로부터 독특한 e메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글로 또박또박 “귀터슬로에서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등을 적어 보내며 로버트에서 딴 한글 이름 ‘노벽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올해 베텔스만 재단에 입사한 젊은 슈와츠 매니저는 한국에서 3년 동안 살았던 ‘지한파(知韓派)’ 연구원이다. 경희대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말을 건네며 기자를 맞았고 취재 내내 옆에서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줬다.

방문에 앞서 슈와츠 매니저와 이번 취재의 취지와 알고 싶어 하는 내용에 대해 수차례 e메일을 주고받고 내부 담당자들과의 면담도 주선해 준 덕분에 충실한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 2~3시간 동안 집단 토론과 같은 분위기로 베텔스만에 대한 취재가 이뤄졌다. 토론을 좋아하는 유럽인 그리고 신속하고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가진 베텔스만 재단의 문화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베텔스만 재단] 사회 발전 모델 적용해 보는 ‘실험실’
베텔스만 재단의 역사와 거의 함께했다는 백발의 안드레아스 헨케 대변인으로부터 베텔스만 재단의 설립 취지와 기본 정신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몬 회장이 재단을 설립할 때 취지가 매우 남달랐다. 그는 단순한 자선과 기부를 넘어 사회적 기여의 방법론으로 ‘혁신과 아이디어 개발’을 택했다.

그는 재단을 통해 기업 경영의 노하우를 정부의 여러 사업에 도입하기 위해 실험에 나섰다. 몬 회장은 자선단체 설립을 통해 사회문제를 찾아내고 해결책을 찾는 사회 혁신 과정으로 사회·정치·기업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몬 회장의 생각에 따라 베텔스만 재단은 후원과 기부 활동을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대신 독일 사회의 미래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전문 인력을 발굴하고 재단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운용한다.

이러한 사업들로 베텔스만 재단은 정책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현재 싱크탱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2009년에 작고한 몬 회장의 뒤를 이어 현재 그의 부인 리즈 몬 부회장이 재단 이사회를 이끌고 있다.
[베텔스만 재단] 사회 발전 모델 적용해 보는 ‘실험실’
베텔스만 재단은 경제정책, 사회복지, 교육·보건 문화 분야의 정책들을 연구·개발하고 세계 각국 정부에 조언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재단의 사업을 일부 들여다보면 인구 통계 변화, 고령화 시대에 맞는 사회 통합 시스템 구축, 이민 정책 개선, 의사 및 의료 서비스 평가 시스템 구축, 연방 시스템 아래 교육 체제 통일 등 굵직굵직한 것들이 많다.

베텔스만 재단은 미래 독일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시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설문 조사를 하는 한편, 각 분야 전문가 100여 명을 모아 토론회를 열곤 한다. 특히 ‘독일의 연방국가 체제에 대해 이대로 좋은가’라는 질문을 사회에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다.

그중 독일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비유되는 논의가 바로 독일의 무상 교육 폐지론이다. 각 정당, 주정부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 이 문제의 중심에 베텔스만 재단은 깊숙이 관여하며 각종 연구와 제안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독일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대학에 입학할 때 등록금을 내지 않는다. 독일은 연방제 국가로, 교육에 대한 의무가 주별로 주어져 있다.

베텔스만 재단은 무상 고등교육이 교육의 질을 저하한다는 폐해를 짚으며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 왔다. 이 논란에 대해 베텔스만 재단의 코너 수석 부이사장은 “등록금을 받지 않는 대학에서는 한 강의실에 약 100명이 들어가고 강의 중 자고 있는 학생이 수두룩하다”며 “학문적인 동기가 강한 학생은 독일을 떠나 유학을 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약 15년 동안 정치적 논란이 되고 있는 이 건에 대해 베텔스만 재단은 각 대학에 자율 운영권을 주자는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현재 독일 16개 주에서 4개 주에서만 등록금을 받고 있고 액수는 500유로(약 77만 원) 정도다.

또한 최근 재단은 수익성 잣대에만 치중하는 3대 국제 신용 평가사를 대체할 비영리 신용 평가 기구를 설립하는 준비 작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기존의 신용 평가가 비난을 받는 부분을 개선해 거시경제뿐만 아니라 마이크로 경제, 민주주의 이행, 정부의 행정 능력까지 평가하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 작업을 위해 미국의 비영리 기구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전문가와 공동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재단 측은 밝혔다.



해외 재단 설립해 국제 문제까지 확대

베텔스만 재단은 ‘비영리·비정부 기구’, ‘싱크탱크’ 등으로 불리기보다 스스로를 ‘사회 실험실’로 일컫는다. 사회 발전 모델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성하고 사회라는 실험실에서 여러 방법으로 테스트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매우 응용 지향적이고 정책 기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재단이 학술 기관과 차이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35여 년간 베텔스만 재단은 이러한 실험실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막강한 연구 인력을 확충해 왔다. 현재 박사급을 포함해 285명의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220명의 전문가와 네트워크를 맺고 있다고 재단 측은 설명했다. 또한 재단은 최근 적극적인 세계화 전략을 펴며 해외 네트워킹을 구축하고 있다.

스페인과 미국에 베텔스만 재단을 설립하고 대륙 간 교류, 교육 문제, 국제 거버넌스, 경제적 협력 등의 이슈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에도 재단을 설립하고 동아시아와의 유대와 협력 관계를 구축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인터뷰 : 레지나 코너 베텔스만 재단 수석 부이사장
[베텔스만 재단] 사회 발전 모델 적용해 보는 ‘실험실’
베텔스만 재단은 그룹의 대주주기도 한데, 자금 운용을 어떻게 하는가.

베텔스만그룹의 77% 주식이 재단에 있다.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한 해 수익으로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한 해 예산은 2011년 기준으로 약 6245만 유로(898억7400만 원)로 프로그램 지원비 비중이 71%(4458만 유로)다.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은 거의 없다.

다만 정부 프로젝트를 진행할 일부 지원금은 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기부를 전혀 받지 않는다. 프로젝트에 따라 관련 단체에 일반인이나 기업이 기부할 수 있어도 베텔스만 재단에 직접적으로는 할 수 없다.


독일 정부는 재단에 얼마나 우호적인가.

독일 헌법에는 부자들이 가져야 할 의식으로 사회 환원을 기본법에 포함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재단이 많이 설립됐고 크게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정부의 법적·세제적 지원이 있다. 재단이 국가나 정부가 해야 할 여러 가지 사업을 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많은 사회문제가 있다. 재단이 많이 설립될수록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한국의 기관·재단 등과 함께 하는 사업이 있는가.

올해 베텔스만 재단의 아르트 얀 더 회스 회장과 리즈 몬 이사회 부회장이 공익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었다. 김황식 국무총리,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등 한국의 정부·기업·학계·사회 분야의 주요 관계자들과 인적 교류를 시작할 수 있었다.

리즈 몬 부회장은 한국의 문화유산과 경제성장에 대해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아직 어떤 공익사업을 할지 언급하기는 이르다. 다만 베텔스만 재단은 과거 동·서독 통일 후 사회 통합 등과 관련해 연구한 많은 실적이 있으므로 한국에 여러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리즈 몬 부회장이 밝혔다.


귀터슬로(독일)=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