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상인들이 생존권을 명분으로 거리로 뛰쳐나가고 정치인들이 법을 갖고 ‘힘’을 쓴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아니다. 21세기 현재 컴퓨터가 아닌 타자기를 앞에 놓고 서류를 작성하는 기업이나 개인이 있을까.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너도 나도 부르자 희망의 노래….”

가수 현인이 불렀던 ‘럭키 서울’이라는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다. 이 노래에도 나오듯이 1949년 당시 타자기로 서류를 작성하던 타이피스트들은 환하게 웃으며 희망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각 사무실에서는 타이피스트들이 없으면 일이 안될 정도로 이들의 인기와 희소성은 꽤나 높았었다. 1980년대까지도 타자기는 중요한 사무기기였으며 타이피스트들은 중요한 인력이었다.

그런데 이들 타이피스트들의 웃음과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 등장했다. 바로 개인용 컴퓨터(PC)의 등장이 그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는 타이피스트들이 제공하던 타이핑(typing)이라는 특수한 일도 이제 컴퓨터 자판만 두드릴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게 만들었다. 타이피스트들이 갖고 있던 ‘특별한’ 능력은 일시에 불필요하게 됐고, 자연히 그런 직종은 모든 사무실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금 젊은 세대 대부분은 타자기라는 것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만약 PC의 등장이 25~30년 늦은 2012년 현재 나타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각 사무실에 근무하던 타이피스트들이 일제히 거리로 몰려 나와 이런 허무맹랑한 구호를 외쳤을지도 모른다. “타이피스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컴퓨터의 사용을 금지하라.” 그러면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은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서민의 일자리와 생존권을 위협하는 컴퓨터 사용을 규제하는 법률을 만들겠다.”

그리고 이 법률에는 컴퓨터를 사용하고자 하는 기업이나 개인은 반드시 까다로운 절차의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만 하며 이 절차 속에는 반드시 해당 기업과 지역의 타이피스트들의 동의를 구하도록 하고 허가를 얻어 사용하는 경우에도 하루 중 겨우 오전 중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규제를 만든다.

허무맹랑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바로 대형 마트 규제와 관련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특히 그렇다. 대형 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개점하기 위해서는 유통산업발전법에 규정돼 있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해야 함은 물론 지역 주민과 지역 상인들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또 한 달에 며칠은 쉬어야만 한다는 의무 휴업 일수도 있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한다는 영업시간 제한도 있다. 어떤 물건은 팔아서는 안 된다는 영업 품목 규제도 있다. 이 모든 규제의 명분은 재래시장과 골목 상권 상인들의 생존권 보호다.

현재는 새로운 기술, 생활방식의 변화 등에 따라 소비자의 소비 행태가 급변하고 이에 맞춰 유통 업체도 적응해가고 있는 시기다. 재래시장 상인들이 생존권을 명분으로 거리로 뛰쳐나가고 정치인들이 법을 갖고 ‘힘’을 쓴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아니다. 21세기 현재 컴퓨터가 아닌 타자기를 앞에 놓고 서류를 작성하는 기업이나 개인이 있을까.

스스로 변신을 꾀하는 재래시장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러지 못하는 재래시장은 조용히 소멸해 갈 것이다. 이런 흐름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경제 산책] 타이피스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권혁철 자유경제원 전략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