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 늦잠 자고 빈둥거리면 아버지는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으셨다. “저 자식은 전방 가서 죽도록 고생해 봐야 사람 된다고….” 말씀대로 전방에서 군대 생활을 했고 죽도록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많이 고생했다. 그 덕분인지 제대 후 지금까지 참으로 열심히 생활해 왔던 것 같다. 2007년 87세로 영면하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지금의 이런 내 모습에 많이 뿌듯해 하실 것이다.

11남매의 장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40세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오신 아버지는 20년 만에 집을 장만하시고 65세에 친구의 권유로 처음 골프를 접하셨다. 아버지가 가장 어려워한 것은 골프 테크닉이 아니라 영어로 된 골프 용어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영어를 배우려는 노력을 계속하셨으며 돌아가시기 1주일 전까지 당신께서 좋아하는 골프를 23년간 하실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고 진취적인 자세로 비전을 제시하는 모습에서다. 아버지는 80세가 되던 해 어느 날 웅변 학원에 등록하셨다며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이유인즉슨 골프회 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조리 있게 얘기하고 회장으로서의 품위를 가져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웅변 학원을 다녀오신 후 항상 스피치 연습을 하셨다. 또한 응접실에 큰 돋보기를 두고 매일 신문을 보셨다. 아버지는 골프회 회장은 물론 최고령 총무를 돌아가시는 날까지 하셨다.
[아! 나의 아버지] ‘우공이산’을 몸소 가르쳐주시다
[아! 나의 아버지] ‘우공이산’을 몸소 가르쳐주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시골에서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으셨지만 한자와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한 아버지는 되로 배워 말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무엇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어떻게 폭넓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또한 겉치레보다 내실을 강조하셨다. 골프 장갑은 항상 세탁해 다시 썼으며 골프채도 10년 이상 한 브랜드를 사용하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할 때, 자주 이용하시던 골프장의 로고가 새겨진 종이 냅킨이 큰 상자로 한 상자 이상 나와 자식들을 놀라게 했다.

내가 유학할 때 석사학위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미국을 방문하신 아버지는 미국의 스포츠산업 현황을 알아보고 앞으로 한국에도 스포츠를 통해 돈을 버는 일이 많을 것이니 박사 학위를 꼭 받아오라고 신신 당부하시기도 했다. 내가 첫 교수로 임용됐을 때는 교수는 제자나 동료들에게 부담되는 행동을 하면 안 되며 정정당당하고 떳떳하게 처신하라고 하시며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하셨다.

내게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면서 큰 산과 같은 존재이셨다. 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처럼만 산다면 참으로 멋진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아들들이 날 그런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자신의 목표가 세워지면 끊임없이 노력하며 자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아버지. 나는 요즈음도 거리 곳곳에서 아버지를 본다. 짙은 안경에 모자를 쓴 작은 체구의 할아버지를 보면 아주 잠깐 동안 내 눈으로 살아계신 아버지를 본 듯 뭉클하다. 160cm의 왜소한 외모였지만 내공이 대단하셨던 아버지가 정말 보고 싶다.


김종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