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으로 근대를 연 장 자크 루소


당신은 산속에 사는 부족에 속한 전사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적과 용감하게 싸우지만 평소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입니다. 하루는 추장이 부족의 모든 사냥꾼을 모아 사슴 사냥을 나가기로 결정합니다. 부족민의 단백질 부족 현상을 우려한 사냥 결정입니다. 이제 대형을 갖춰 각자 자신의 역할을 맡습니다. 당신은 저쪽에서 사슴을 몰아오는 몰이꾼 반대편에 매복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록 사슴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토끼 한 마리가 눈앞에서 알짱거립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장 자크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는 사슴과 토끼의 이야기입니다.
[CEO 리더십] 인간은 어떻게 자연의 지배자가 됐나
사슴과 토끼 사냥의 딜레마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죠. 첫째, 일단 토끼를 혼자 잡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나는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성공합니다. 문제는 사슴을 잡는 데 실패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포함한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실패하는 겁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내가 사슴 잡는 대열에서 이탈해 토끼를 잡아 내 가족의 굶주린 배를 채우겠다는 결정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나는 이제 부족을 배신한 배신자로서 부족에서 추방되는 것이 당연합니까?

물론 사슴이 지금 당장 오지 않았다는 것이지 계속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나타날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냐는 것입니다. 사슴은 눈에 보이지 않고 토끼는 지금 내 눈앞에서 ‘나 잡아봐라!’하며 뛰놀고 있습니다. 이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자리를 이탈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슴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보장은 없어. 그리고 재빨리 잡고 나서 내 자리로 돌아오면 토끼도 잡고 사슴도 잡는 일석이조’라고 하겠습니까.

둘째, 이제 사슴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합시다. 눈앞에서 놀던 토끼도 이제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하염없이 기다려도 사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결국 사냥을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든 시점이 됐는 데도 사슴은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침울하고 지친 표정으로 마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뭐, 항상 사냥에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라고 자위해 보지만 지친 몸과 주린 배는 힘들게 만들기만 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처자식들 생각에 가슴이 찢어집니다. 가장으로서 면목이 서지 않는 겁니다. 이때 다른 전사 한 명이 배낭 속에 토끼를 넣어 가는 것을 언뜻 봅니다. 자, 그 사람이 토끼를 잡는 바람에 그 쪽 포위망에 구멍이 뚫려 사슴을 놓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운 없이 사슴이 그곳에 전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길이 없지만 이 시점에서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인간은 토끼를 갖고 있고 내 손에는 토끼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사슴을 지키기로 하는 순간 사실은 다른 인간들은 토끼를 잡기로 하는 것에 대해 나 혼자 사슴 사냥에서 벌어지는 리스크를 다 떠안아도 좋다는 결정을 내린 겁니다.

셋째, 애초에 사슴 사냥을 나간 건 사실이지만 이제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너도나도 토끼를 잡는 데 열중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사슴은 보이지 않고 추장은 독려하지만 리더십은 이미 실종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정도 이상의 사람이 사슴 사냥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대열에 남아 있다는 것이 무의미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사슴은 어차피 나 혼자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협동의 길은 멀고 사익 추구는 확실한 상황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반복되기 시작한다면 각 개인은 토끼를 먹는 데는 성공하지만 사슴 사냥이라는 협동 작업에는 실패합니다. 그 부족들이 사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없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은 왜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갈까요. 혼자서 숲속에 들어가 사냥하면 큰 짐승을 잡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기껏해야 토끼 정도, 그나마도 혼자서 늘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 대신 맹수에게 잡혀 먹히는 사냥감이 될 확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둘이서 함께 사냥하러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슴과 같이 좀 더 큰 동물을 잡을 확률은 더 올라가고 반면에 사자나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일은 좀 줄어듭니다. 세 명 이상이 나가면 맹수도 사냥할 확률이 생깁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협동하고, 서로 인내하고, 무엇보다 서로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서로 신뢰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핵심 사항입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시작은 사냥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야 저리가! 이리 와!” 이런 원시적 언어가 공간과 시간을 소통하면서 상호 협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맹수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된 겁니다. 소통 없이는 큰일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냥의 필요에서 원시적 언어 탄생

자, 그러면 루소가 제기한 사슴 사냥과 토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 해결책은 당연히 ‘사냥의 결과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라는 분배 정의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냥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눠먹는 문제에 대한 소통을 분명하게 해둬야 합니다. 지속 가능한 생존이 이뤄지려면 분배 정의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이클 테일러라는 정치 철학자는 원시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연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발견됩니다.

그 부족은 두 가지 종류의 식량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을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식물입니다. 누구든지 쉽게 채취할 수 있고 그 양이 비교적 풍부한 채소 종류입니다. 평범한 식자재입니다. 주로 부녀자들이 나가서 따온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숲속으로 며칠씩 사냥 여행을 떠나야 잡을 수 있는 동물입니다. 항상 잡아 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허탕을 치는 일도 꽤 많습니다. 추장이 누구인지, 전사들의 사냥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따라 많이 잡을 수도 있고 적게 잡을 수도 있습니다.

수확량은 들쭉날쭉합니다. 자, 테일러가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둘 중 하나는 모두 평등하게 나눠가지고, 다른 하나는 각자 기여한 만큼 차등적으로 가져간다는 것입니다. 합리적 분배라고 생각하십니까?
[CEO 리더십] 인간은 어떻게 자연의 지배자가 됐나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물성단백질 섭취가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평등한 운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몸만 움직이면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는 채소는 각자 일한 만큼 가져가는 겁니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데에는 협업과 분업을 할 줄 아는 합리적 동물이라는 점이 작동합니다. 신뢰가 기초되지 않으면 대규모 레벨의 협업은 불가능합니다. 신뢰는 상호 소통을 정확하게 하는 데서 옵니다.

토끼를 잡으려면 소통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사슴을 잡기 위해서는 협동해야 하고 협동하기 위해서는 소통해야 합니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