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패션 메카 동대문시장은 기회의 땅이다. 배경이 좋든 나쁘든, 가방끈이 길든 짧든 상관없이 감각·끈기·노력으로 성공을 일굴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동대문은 수많은 ‘패션왕’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수많은 패션왕 지망생들이 동대문을 찾고 있다. 동대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동대문에서 성공을 일군 ‘패션왕’ 3인방으로부터 성공과 실패의 조건을 들어봤다.
‘기회의 땅’ 동대문의 패션왕들
드라마 ‘패션왕’의 실존 인물로 유명한 최범석 제너럴 아이디어 대표가 바닥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패션왕’이 되기 위한 과정은 이렇다. ①동대문시장 도매상에서 옷을 사다가 노점상으로 시작 ②‘지붕 있는 가게’를 낸다 ③장사가 잘되자 똑같은 가게가 생김 ④동대문에 들어가 직접 의류를 만들어 도매상이 된다 ⑤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패션쇼 데뷔, 디자이너가 된다 ⑥해외 컬렉션에 도전해 인정 받는다

최 대표는 ①의 과정을 17세 ②는 20세 ④는 21세 ⑤는 27세 ⑥은 33세에 이뤘다. 올해 초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끌 때 그는 한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중졸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 그의 나이는 36세(1977년생), 그의 회사 매출은 연 60억 원이다.

동대문에 있는 의류 업체 헴펠의 명유석 대표는 최 대표와 비교하면 극과 극이다. 그는 건국대 의상학과를 졸업했고 숭실대 섬유패션과 석사 소유자다. 대학교 4학년 때 의류 업체에 취업해 14년 동안 일한 뒤 37세에 독립해 지금의 브랜드를 일궜다. 지금 그의 나이는 47세, 그의 회사 매출은 연 600억 원이다.

최범석 대표가 빙벽을 타고 급하게 정상에 올랐다면 명유석 대표는 정해진 루트를 통해 천천히 정상에 오른 셈이다. 정해진 루트를 탔다고 해서 히말라야 같은 고산준봉에 오른 것이 별것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둘 다 엄청난 끈기가 필요하고 혹한과 칼바람에 버틸 수 있는 깡이 필요하다.
‘기회의 땅’ 동대문의 패션왕들
그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동대문이라는 배경이다. 학력이 있건 없건, 배경이 좋건 나쁘건 감각과 사업 수완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열심히 하는 만큼 성공에 다가갈 수 있는 곳이 동대문이기 때문이다. 동대문에서 도매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4시에 열리는 새벽 시장을 위해 3시에는 기상해야 하고 오전에는 주문 확인, 오후에는 주문을 넣은 공장에서 주문대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현장 확인, 저녁에 다시 열리는 저녁 시장에 매달리다 보면 11시가 넘어서 끝날 때가 많다. 집에 가서 잠드는 시간은 새벽 1시. 집에서 자는 시간은 기껏해야 2시간으로 명 대표는 이런 생활을 10년 넘게 했다. 출퇴근하는 시간도 아끼기 위해 동대문 근처에 아파트를 얻어 사무실로 썼을 정도다.

최 대표는 어리다는 이유로 원단 샘플 북을 보여주지 않는 상인들에게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의정부의 옷가게가 끝난 뒤 떡볶이를 사들고 상가 상우회를 한 달 내내 매일 찾아갔다. 끈기와 의지가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도 동대문에 도매상을 낸 뒤에는 명 대표와 같은 생활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패션왕의 꿈을 꾸며 동대문을 찾고 있다. 가로수길과 홍대의 옷가게들도 물건은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가져온다.

그러나 ‘기회의 땅’이던 동대문에서의 성공의 가능성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이미 10년 전부터 중국으로 의류 업체의 생산 기지가 많이 넘어갔고 최근 2~3년 사이에는 글로벌 SPA(패스트 패션) 업체들의 저가 의류 공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각이 좋은 디자이너라도 동대문에서 소량으로 의류를 제작해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 동대문에서 의류를 주문 제작하는 영세한 공장들에는 1960~1970년대 봉제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전태일의 누나 세대들이 아직도 현역으로 일하는 것이다. 일이 없으면 쉬고 일이 많으면 밤늦게까지 일한다. 물량이 일정하지 않으니 법인을 세워 직원을 채용하지도 못하고 개인적으로 받은 아르바이트 물량을 단순히 한곳에서 작업하는 식이다. 젊은이들이 공장에 일하러 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이다.

한 줄기 희망이라면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한류’ 열풍이 불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적 트렌드를 가장 빨리 반영할 수 있는 현지 생산품을 동남아 수입상들이 찾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질 때 또 하나의 성공 스토리가 나오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
사진=서범세·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