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촌놈이다. 강원도 삼척, 바닷가가 가까운 농촌이 내 고향이다. 아버지는 장남이셨다. 할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농사일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농사일을 하셨다. 학교 다니실 때 공부도 꽤 잘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집안 형편상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남으셨나 보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인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연필을 빌려달라고 하신다. 그래서 왜 필요하냐고 물으니 별 대답이 없으셨다. 난 그때 몰랐다. 아버지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사일만으로는 벌이가 시원치 않으셨을 것이다. 자식 세 명을 다 공부시키고 대학 보내려면 아무래도 말이다. 그래도 십수 년을 책을 놓고 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시려고 하니 머리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묵묵히 공부를 하셨다. 농사일도 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듬해 9급 행정직 공무원이 되셨다.

아버지는 비록 늦게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나이 어린 후배들과 함께 열심히 하셨다. 주말에는 농사일도 빼놓지 않고 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와 내 두 동생들은 중·고등학교를 보내고 모두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공무원에게 나오는 자녀 학자금 덕을 본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장남인 내가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다. 말단 공무원으로 새파랗게 젊은 행시 출신 간부들에게 서러움이 있으셨나 보다. 그런데 난 그때 왜 그렇게 미꾸라지 같았는지 모른다. 난 공무원이 되기가 죽어도 싫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엔 이과에 가겠다고 그렇게 우겼다.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번엔 내 말을 듣고 문과에 가라고, 그런 다음부턴 네가 판단해 네 인생 살라고…. 아버지는 문과에 가면 내 생각이 바뀔 것으로 여기셨나 보다. 그 말씀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난 아버지 당부대로 문과를 선택했지만 그 후 인생은 내 판단대로 살았다. 대학 선택도, 학과 선택도 그리고 직장까지도. 그리고 결혼도.
[아! 나의 아버지] “연필 좀 빌려 줘” 하셨던  그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경제학과로 진로를 선택해 그런지 여전히 행정고시에 대한 미련이 있으셨나 보다. 그럴 때마다 난 더 미꾸라지 기질을 발휘했다. 행시든 사시든, 공인회계사든 내 주위 친구들이 많이 준비하고 있었지만 난 그런 시험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학과 공부에 흥미를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마냥 공부가 싫었고 틀에 박힌 생활을 하는 공무원 같은 직업이 싫었을 뿐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벤처캐피털에서 새로운 비즈니스에 투자하며 젊은 창업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유로운 기질은 다 이런 반항 기질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더라도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도 아버지의 공무원 되라는 압력이 나를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한 것만은 분명하다. 다행인 것은 막내 동생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서울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나도 결혼하고 딸 둘을 둔 아버지가 됐다. 그러던 올해 3월 어느 날, 난 유치원 다니는 내 딸에게 연필 좀 빌려달라고 했다. 딸은 “아빠 왜?”라며 눈알에 힘을 주며 묻는다. 난 그저 대답 없이 빌려달라고 했다. 딸이 연필을 건넨다.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아버지께서 손수 칼로 연필을 깎으셨는데 난 딸아이의 연필깎이 기계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아버지께서 느지막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연필을 썼던 것처럼, 난 나이 마흔 넘어 박사 논문 쓴다고 딸아이의 연필을 빌리고 있다. 내가 아버지에게 연필을 드리며 마음속으로 했던, “아빠, 시험 꼭 붙어”라는 말이 지금 내 딸이 “아빠, 논문 잘 써”라는 말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이희우 IDG 벤처스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