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부진 지속…국가 부도 우려


금융 위기 이후 일본 경제는 ‘안전 통화의 저주(curse under safe haven)’에 시달렸다. UC버클리대의 베리 아케켄그리 교수가 처음 주장했던 안전 통화의 저주는 미국·유럽의 잇단 위기로 안전 통화로 부각된 엔화가 강세가 돼 가뜩이나 어려운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이 우려될 정도로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지난해 내내 일본 경제는 엔고에 시달렸다. 새로 출범했던 노다 정부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왔지만 취약한 재정과 장기간 ‘제로(0) 금리정책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 바닥이 났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의 해외 진출 억제와 경기 부양 차원에서 엔고를 저지하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에 주력했다.

하지만 국제 금융시장에서 보는 시각은 냉담했다. 일본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져 어떤 정책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효과가 의문시됐기 때문이다. 5대 함정이란 무엇보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 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정책의 함정(policy trap)’을 들 수 있다. 주가와 경기 침체의 회복 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금리 인하 정책은 ‘유동성의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YONHAP PHOTO-0616> FILE - In this file photo takem Feb. 16, 2011, workers assemble Yaris compact sedans, set for export to North America, on a newly opened assembly line at a plant of Toyota Motor Co.'s group company Central Motor Co. in Ohira in Miyagi Prefecture, northern Japan. Toyota Motor Corp., the world's biggest automaker, said Wednesday, March 16, 2011, it will extend production halts at its car plants through March 22, affecting about 95,000 vehicles. (AP Photo/Koji Sasahara, file)/2011-03-17 07:41:19/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FILE - In this file photo takem Feb. 16, 2011, workers assemble Yaris compact sedans, set for export to North America, on a newly opened assembly line at a plant of Toyota Motor Co.'s group company Central Motor Co. in Ohira in Miyagi Prefecture, northern Japan. Toyota Motor Corp., the world's biggest automaker, said Wednesday, March 16, 2011, it will extend production halts at its car plants through March 22, affecting about 95,000 vehicles. (AP Photo/Koji Sasahara, file)/2011-03-17 07:41:19/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일본처럼 정책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 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또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는 최종 목표인 수익성과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의 함정(structure trap)’에 빠져 있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이 증대돼 예측 기관들은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의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 과정에서 20년 이상 지속된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했던 모든 정책이 무력화돼 죽은 시체와 같은 ‘좀비의 경제(zombie economy)’라고 불려 왔다. 1990년 이후 무려 20차례가 넘는 경기 부양 정책은 국가 채무가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할 정도로 재정 수지만 악화됐다.

기준금리도 ‘제로’ 수준까지 인하했지만 경기 회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각종 미명하에 구조조정 정책을 20년 넘게 외쳐 왔지만 경제구조를 개선하는 데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함에 따라 정책과 국민들의 불신과 악순환만 키워 왔다. 이 때문에 대내외 전망 기관들이 1990년대 이후 전망치를 가장 많이 수정한 국가가 일본이다.

정책적으로 일본의 재정은 유럽의 재정 위기 국가들 못지않게 취약한 상태이고 앞으로도 재정 악화 요인이 산재해 ‘일본발 재정 위기’가 표면화될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현재 국내총생산(GDP)에 대비한 국가 채무 비율은 200%를 넘어 그리스·아일랜드 등 유럽 재정 위기 국가를 크게 웃돌고 있고 재정 수지 적자도 GDP의 10%에 근접한다.

향후 인구 감소 등을 감안할 때 일본의 재정 상태가 더욱 취약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가 개선될 가능성이 적다면 지난해에 올해도 일본의 국가 신용 등급이 추가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재정 적자에 따른 국가 신용 등급이 추가적으로 하락한다면 일본 경제의 국가 부도(default) 우려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국채의 95%를 일본 국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국민들이 부도 시 겪게 될 ‘낙인효과(stigma effect)’보다 ‘최종 대부자(last resort)’ 역할을 해줄 것으로 보여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국가 부도에는 몰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에는 일본 국민들의 애국심이 약화되고 있어 이마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일본 경제, ‘안전 통화 저주’ 벗어날까
엔화 약세로 전환돼야 문제 해결

재정 적자와 함께 일본 경제가 당면한 또 하나의 과제인 디플레 국면을 언제 탈피할 것인지도 예의 주시해야 할 변수다. 일본의 실질 GDP 성장률은 1980년대 평균 4.7%에서 1990년대 이후 1.2%로 급락한 것은 내수 부진에 주로 기인한 점을 감안하면 디플레도 이 요인이 큰 것으로 지적됐다.

수출의 성장 기여도는 1970년대 이후 0.5~0.8% 포인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내수 기여도는 1970년대 3.8% 포인트, 1980년대 4.0% 포인트에서 1991~2008년에는 0.6% 포인트로 급락했다. 이 때문에 GDP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에 89.6%에서 2008년에는 82.5%로 크게 떨어져 경기 침체와 디플레 등 구조적인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그런 만큼 당분간 일본 경제는 내수 부문의 활력을 되찾아 디플레 국면에서 탈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내수 부진이 고용과 임금 불안정성 증대, 인구 고령화 진전 등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요인들에 주로 기인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경제가 당면한 구조적 문제점을 풀기 위해서는 엔화 가치가 약세로 전환돼야 가능하다. 다행히 올 2월 이후 유럽 위기 진정과 대규모 무역 적자, 일본은행의 양적 완화 등으로 엔화가 약세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예측 기관들은 앞으로 엔·달러 환율이 완만하게 상승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본 경제 회복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일본 경제가 ‘안전 통화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회복 국면에 접어들 수 있는지는 ‘제2의 역플라자 합의’가 나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역플라자 합의(anti-Plaza agreements)는 미국 달러화에 대한 엔화 약세인 만큼 제2의 역플라자 합의가 나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국의 태도가 관건이다.

최근 글로벌 환율 전쟁과 탈(脫)달러화 조짐의 빌미를 제공하는 미국도 향후 달러화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이 금융 위기 극복 이후 당분간 자체적으로 금리 인상을 통해 저축률을 제고하는 정책 수단을 갖추지 못한다면 최대 현안이 될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달러 약세를 유도하거나 최소한 방치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처럼 수출입 구조가 비탄력적이어서 무역수지 개선의 전제 조건인 ‘마셜-러너 조건(Marshall-Lerner condition)’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다, 과도한 달러 약세는 미국 내 자본 이탈에 따른 역자산 효과로 경기를 급락시킬 가능성이 높아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모든 통화에 대해 달러 평가 지수(dollar parity index)를 낮추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미국은 모든 통화에 대해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보다 경상수지 적자를 많이 발생시키는 중국 등의 통화가치가 절상되도록 대외 정책의 초점을 맞춰나가는 ‘이원적인 전략(two-track strategy)’을 추진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1995년처럼 엔·달러 환율이 79엔에서 148엔까지 오를 만큼 제2의 역플라자 체제가 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최근 엔화가 약세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일본 경제의 앞날을 보는 시각이 비관적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용어 설명
● 디플레이션이란…
성장률과 물가 상승률이 동시에 ‘마이너스(-)’ 국면으로 떨어지는 현상이다. 특정국 경제가 이 국면에 빠지면 어떤 정책 신호에도 경제 주체들은 반응하지 않는 무기력증으로 경기순환 이론에서 경기 침체 하에 물가가 올라 정책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스태그플레이션보다 더 어려운 최악의 경기 상황으로 평가한다.



● 마셜-러너 조건이란…
마셜-러너 조건에서 자국 통화가 10%만큼 평가절하되면 달러표시 수출 가격은 10% 하락하고 자국 통화 표시 수입 가격은 10% 상승한다. 이 때문에 자국 통화가 10% 평가절하될 때 무역수지가 개선되려면 수출량 증가분과 수입량 감소분의 합이 10% 이상 돼야 하지만 이 조건이 충족되지 못할 때에는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는 악화되는 ‘J-커브 효과’가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