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중흥기에 들어선 한국 반도체 산업


‘한국 반도체 산업이 제2의 중흥기에 들어섰다.’ 최근 나온 증권가 보고서는 반도체 업계의 달라진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2010년 말 불붙은 D램 시장의 치킨게임은 한국 기업들의 승리로 굳어지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비메모리 시장이다.

모바일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분야의 절대 강자로 부상한 삼성전자는 지난해 비메모리 제품으로만 10조 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 추세라면 2013년 하반기에는 인텔을 추월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기회로 활용하는 ‘성공 공식’의 재현이다. 재계 3위 SK그룹을 새 주인으로 맞은 하이닉스반도체도 경쟁사들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다.
모바일형 제품 주도… 비메모리도 인텔 위협
세계 반도체 업계를 얼어붙게 한 치킨게임의 종료가 임박했다는 신호가 뚜렷해지고 있다. 본래 치킨게임은 서로 마주보고 달리다 먼저 핸들을 꺾는 사람이 패하는 자동차 충돌 게임에서 따온 용어다. 반도체 가격이 폭락해 원가 이하로 팔면서도 누군가 먼저 손을 들고 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버티는 상황을 가리킨다. 주요 업체 한두 곳만 쓰러져도 금방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폭등해 그간 쌓인 손해를 순식간에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의 목숨을 건 치킨게임은 이번이 두 번째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진 2007~2009년 D램 가격이 곤두박질치며 피 말리는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1차 치킨게임은 독일 키몬다의 파산과 D램 업계의 전면적인 감산으로 마무리됐다. 두 번째 악몽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0년 말부터 D램 가격이 또 한 번 폭락세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애플 아이폰발 모바일 혁명에 밀려 PC 시장이 침체에 빠지면서 D램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2010년 9월 4.34달러였던 2기가바이트(2GB) 제품 가격이 작년 12월 0.88달러까지 떨어졌다. 5분의 1로 주저앉은 셈이다. 대부분 업체가 물건을 팔면 팔수록 손해가 커지는 수준이다.

먼저 손을 든 것은 일본과 대만 업체들이다. 세계 3위 D램 업체인 일본 엘피다가 작년 3분기에 생산량을 20% 줄였다. 대만의 난야(5위)도 9월부터 10% 감산에 들어갔으며 파워칩(6위)도 10월 들어 생산량을 절반으로 줄였다. 반도체 업체에 감산은 치명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 번 감산에 들어가면 생산량 회복에 최소 3개월이 걸린다”며 “시장이 회복돼도 제때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모바일형 제품 주도… 비메모리도 인텔 위협
목숨 건 치킨게임…최후 승자는 삼성전자·하이닉스

D램 공정은 웨이퍼를 굽고 말리고 찍어내는 수백 단계의 세부 공정으로 나뉜다. 최초 웨이퍼를 투입해 완제품이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2~3개월이다. 라인이 한 번 멈추면 중간 단계의 제품을 모두 걷어내야 한다. 반도체 라인이 1년 내내 멈추지 않고 가동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이 감산을 선택한 것은 천문학적인 적자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피다는 지난해 490억 엔의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사상 최대 규모다. 매출액도 1600억 엔으로 반 토막이 났다. 대만 업체들은 D램 가격이 1달러대로 떨어진 2010년 말부터 영업 적자 상태다. 난야는 작년 4분기에만 91억8100만 대만 달러(약 349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난야는 8분기 연속 적자로 생존 위기에 몰려 있다.

D램 업계 1~2위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치킨게임에서 요지부동인 것은 경쟁사들을 압도하는 원가 경쟁력 덕분이다. 반도체의 원가 경쟁력은 미세 공정과 직결된다. 이를테면 반도체 회로 간 폭을 30나노미터(nm)에서 20nm로 10nm 축소하면 생산량이 50~60% 증가한다. 똑같은 크기 웨이퍼 한 장으로 D램을 100개 만들던 것을 150개 이상으로 대폭 늘릴 수 있는 것이다.

국내 업체들은 시장 불황 속에서도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20nm 공정으로 속속 전환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작년 8월 가장 먼저 20nm 제품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하이닉스도 올 상반기 중에 20nm 양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반면 해외 경쟁사들은 아직 30nm 기술을 적용한 제품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미세 공정 전환은 엄청난 시설 투자가 뒷받침돼야만 가능한 일이다. D램 시장의 경쟁이 ‘자본 싸움’으로 불리는 이유다. 경쟁사보다 한 발 앞서 최신 장비를 구매하고 수율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경쟁 포인트다. 한 번 경쟁에서 밀려난 업체는 좀처럼 재기가 불가능한 구조다.
모바일형 제품 주도… 비메모리도 인텔 위협
모바일형 제품 주도… 비메모리도 인텔 위협
작년 9월 말 기준으로 삼성전자가 쌓아 둔 현금성 자산은 22조 원대에 달한다. 반면 같은 기간 엘피다의 현금성 자산은 1002조 엔(약 1조5003억 원)으로 삼성전자의 10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친다. 더구나 엘피다는 누적 적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다. 이미 막대한 현금을 쌓아 둔 삼성전자는 최근 15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 채권시장의 문을 두드려 경쟁사들을 주눅 들게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현지법인을 통해 10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해 오스틴 반도체 공장 설비 투자에 쏟아 부을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반도체에만 15조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SK그룹을 새 주인으로 맞은 하이닉스도 작년보다 대폭 늘어난 4조 원가량을 투입한다.

하지만 이것이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독주를 설명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국내 업체들은 ‘절묘한’ 변신을 통해 PC 시장의 몰락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제품 포트폴리오를 갖는 데 성공했다. D램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PC D램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확산되면서 모바일 D램 제품은 오히려 호황을 맞고 있다. 모바일 기기의 성능이 고도화하면서 기본 장착 메모리 용량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모바일 D램 시장 1~2위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다. 모바일용 메모리는 전력 사용을 최소화하고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 모듈이 아닌 온보드 형태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기술적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작년 3분기까지도 대만 업체들은 모바일 D램 생산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마이크론과 엘피다도 품질과 수율 확보에 고전 중이다. 주요 업체 중 비PC D램 매출 비중이 60%대를 넘어선 곳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뿐이다.

최근 세계 D램 업계는 3~5위 업체들의 연합설로 술렁였다. 벼랑 끝에 몰린 일본 엘피다(3위)와 미국 마이크론(4위), 대만 난야(5위)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에 대항하기 위해 경영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경영 통합은 각사가 별도 법인을 유지하면서 구매와 개발 생산 등을 상호 협의 하에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들이 손을 잡으면 시장점유율이 단숨에 28%로 뛰어 하이닉스(22%)를 앞지른다. 1위인 삼성전자(45%)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각자 보유한 기술 특허를 공유하고 협력 작업으로 생산과 판매비용을 절감하면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판단이다.

한국 업체에 대항한 다국적 연합군 결성은 우자자오 난야 회장이 통합 논의 자체를 공식 부인하면서 며칠 만에 급제동이 걸렸다.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업체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물려 있어 실제 통합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송종호 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이미 균형 잡힌 제품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고 비교적 안정적인 실적을 내는 마이크론으로서는 엘피다와의 통합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다”며 “오히려 엘피다를 고사시키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모바일형 제품 주도… 비메모리도 인텔 위협
전문가들은 이번 통합설이 일본에서 처음 나왔다는 데 주목한다. 극심한 자금난에 빠진 엘피다가 자구책으로 급조해 낸 구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엘피다는 3~4월 만기가 돌아오는 공적자금과 채권 상환을 위해 당장 920억 엔(약 1조3000억 원)대의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다. 엘피다는 애플 등 10여 개 거래 기업을 돌며 반도체 물량을 장기 공급하는 대신 선수금을 요구해 운영자금으로 쓰는 고육책을 쓰기도 했다. 낸드 플래시 2위인 도시바와의 합병설이 도는가 하면 작년에는 삼성전자를 제치고 25nm D램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가 공수표로 끝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엘피다는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 1위였던 NEC와 미세 가공 기술 선두를 자랑하던 히타치의 D램 사업부가 합쳐 1999년에 만들어진 회사다. 일본에 마지막 남은 D램 업체로 일본 반도체 업계의 자존심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좌충우돌하는 엘피다의 최근 행보는 제1차 치킨게임 때 무너진 키몬다의 최후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2차 치킨게임의 종료가 임박했다는 강력한 신호다.
모바일형 제품 주도… 비메모리도 인텔 위협
모바일형 제품 주도… 비메모리도 인텔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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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형 제품 주도… 비메모리도 인텔 위협
모바일 AP 절대 강자…수년 내 인텔 추월

그러나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무대는 비메모리 분야다. D램을 중심으로 한 메모리 시장에서 한국 업체들의 강세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반면 비메모리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혀왔다. 시장 규모가 메모리보다 3배 가까이 큰 비메모리 분야에서 한국 업체들은 번번이 자존심을 구겼다.

최근 삼성전자의 놀라운 약진은 이런 구도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제품으로만 10조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2010년 하이닉스 매출액이 11조9700억 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하이닉스 만한 규모의 비메모리 반도체 회사가 새로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다. 김성인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부문이 2009년 이후 매년 50% 이상 고속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비밀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핵심 부품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급성장이다. AP는 이들 모바일 기기에서 프로그램 구동, 동영상 재생 등 각종 기능을 실행할 때 연산 작업을 수행하는 핵심 반도체다. PC의 중앙처리장치(CPU) 역할을 해 ‘스마트폰의 두뇌’로도 불린다. 삼성전자는 이 시장의 글로벌 1위 업체다. 2008년 처음 선두로 올라선 이후 빠른 속도로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해 세계 AP 시장 절반 가까이를 혼자 차지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탑재되는 A4 칩과 A5 칩을 전량 위탁 받아 공급한다. 자사의 갤럭시폰에 들어가는 AP 제품 엑시노스도 생산한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 1~2위 업체의 AP 수요를 거의 독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에 더 큰 행운은 AP 시장이 놀라운 성장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는 데다 향후 고성능 칩이 개발되면 노트북과 PC, 일부 서버까지 사용 영역이 넓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2015년이면 AP 시장 규모에서 CPU를 앞지를 것으로 예상한다. 이렇게 되면 삼성전자가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모두 석권하며 반도체 시장의 명실상부한 최강자로 올라서게 된다. 송종호 애널리스트는 “CPU에서 AP로 움직이는 메가트렌드는 반도체 시장의 패권이 인텔에서 삼성전자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분야에서 쓰고 있는 새로운 성공 스토리는 1990년대 D램 시장에서의 대약진을 연상시킨다. 1980년대까지 세계 D램 시장은 일본 업체들의 독무대였다. 후발 주자로 뛰어든 삼성전자는 1990년대 D램 시장의 중심이 대형 컴퓨터에서 PC로 옮겨가는 변화에서 기회를 잡았다. PC용 D램은 극한 성능보다 저비용과 소형화가 관건이었다. 삼성전자는 이러한 요구에 맞춰 PC용 D램을 싼값에 대량생산함으로써 일본 업체들을 순식간에 따돌렸다. 이번에는 PC에서 모바일 기기로의 전환이 또 한 번의 기회를 마련해 준 셈이다.

SK그룹에 인수된 하이닉스도 비메모리 분야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하이닉스는 2004년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메모리 부문을 매그나칩에 매각한 후 D램과 낸드 플래시를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해 왔다. SK그룹은 하이닉스의 비메모리 부문 육성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김성인 애널리스트는 “비메모리는 메모리와 기술적 난이도에서 차이가 커 하루아침에 성과를 낼 수 없다”며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 업체 인수가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