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기 크레디트 스위스 대표

미로처럼 생긴 복도를 따라 들어선 대표실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나 봤음직한 거대한 몸집의 고래와 상어(그것도 식인상어) 사진 3장이 벽면을 장식한 풍경이 그것. 짙푸른 바닷속을 유영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사진 속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했다.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들어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사진 속에 고래와 상어를 담아낸 주인공은 바로 이천기(46) 크레디트 스위스 한국대표다. 식인상어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위험천만한 모습을 상상하니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한데 정작 본인은 “6m에 달하는 야생 식인상어를 바로 앞에서 촬영하는데, ‘죽어도 내 책임’이라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바다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웃으며’ 말한다.
스쿠버다이빙광, ‘목숨 건’ 이중생활
‘죽어도 좋다’ 서약서 쓰고 상어 다이빙

이 대표는 스쿠버다이빙광(狂)이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 전 세계 스쿠버다이빙 최고 자격증으로 꼽히는 PADI(Professional Association of Diving Instructors) 기관 인증 자격증을 소유한 다이브 마스터다. 게다가 수중촬영도 전문가급이다. 뭔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 비즈니스의 세계 밖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결과다.

이 대표가 스쿠버다이빙에 눈을 뜬 것은 10여 년 전이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좋아했던 그는 한때 물고기를 키웠고 한동안 바다낚시에 심취했다. 그러나 물고기를 죽이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는 ‘죽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하게 됐다. 스쿠버다이빙은 성취욕과 모험심이 강하고 도전을 즐기는 그의 기질과 딱 맞아떨어졌다.
스쿠버다이빙광, ‘목숨 건’ 이중생활
비행기를 몇 번 갈아타는 것도 모자라 12시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갈라파고스제도 다윈섬에서 18m에서 20m에 달하는 고래를 촬영하기도 했고 1년에 한 번씩 새끼를 낳고 기르기 위해 돌아오는 고래들을 만나러 통가의 섬으로 떠나기도 했다. 특히 모 방송사의 요청으로 다큐멘터리 촬영 팀에 동행해 남태평양 오지의 섬 불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에서 모기떼와 싸워가며 지냈던 경험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지난 10년간 틈만 나면 전 세계 유명하다는 다이빙 지역들을 쫓아다니다 보니 물속에서 보낸 시간만 1000여 시간. 다이빙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맞먹는 수준이다. 문제는 갈수록 좀 더 위험한 곳을 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태산인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인터뷰 도중 ‘말을 아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스쿠버다이빙광, ‘목숨 건’ 이중생활
“하면 할수록 레벨 업이 되다 보니 보통 사람들이 가는 곳은 시시해지더군요. 수중촬영 경력이 5년 정도 됐는데 상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도 나만의 스페셜티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 힘들기 때문에 상어 사진은 많이 없거든요. 상어 1500마리가 사는 남태평양의 섬에 갔는데, 상어 떼가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진짜 장관이더라고요. 그걸 촬영한 후엔 좀 더 무서운 게 없을까 생각하게 됐죠(웃음). 같은 고래나 상어를 찍더라도 점점 더 가까운 곳에서 촬영을 시도하게 됐고요. 최근에는 고래와 악수도 했어요. 고래가 워낙 집채만 해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지느러미에 치여 뇌진탕에 걸리기도 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도 있어 위험하거든요. 그 덕분에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사진들이 많고 언젠가는 사진전을 열 계획도 있습니다.”

M&A와 스쿠버다이빙은 닮은꼴

물론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수심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공기가 떨어져 수면 위로 올라오기 힘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고 카메라를 조작하다가 일행들로부터 멀어져 혼자 몇 시간 동안 배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침착성을 잃지 않는 것. 이 대표는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고 기본 원칙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건 다이빙이 주는 교훈”이라며 “비즈니스를 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스쿠버다이빙과 이 대표의 비즈니스는 닮은꼴이다. 2002년 국내 최연소 외국계 증권사 대표로 임명된 이 대표는 굵직한 기업 인수·합병(M&A)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자산관리공사 및 산업은행의 대우종합기계 매각 자문을 비롯해 LG생활건강의 코카콜라 보틀링 컴퍼니 인수, 잉가솔랜드의 밥캣 두산 인프라코어 매각, 월마트의 월마트 코리아 매각, 현대상선의 자동차운송사업부 매각, 동원그룹의 스타키스트 매입 건 등을 총지휘했다.
스쿠버다이빙광, ‘목숨 건’ 이중생활
“M&A와 스쿠버다이빙은 공통점이 많아요. 먼저 둘 다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죠. 막연하게 위험이 두려워 잠수를 하지 못한다면 바닷속 황홀한 세계를 결코 체험할 수 없어요. M&A에도 리스크가 따르죠. 그래서 자문할 때 고객의 입장에서 리스크를 분석하고 설득하는 게 중요하죠. 항상 기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도 같아요. 기본적인 다이빙 안전 수칙을 무시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죠. M&A 역시 그 기업의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전략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기본 원칙에 근거해 다각도로 검토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닷속이나 M&A나 예측 불가능한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럴 땐 파트너와의 상호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스쿠버다이빙의 마력에 흠뻑 빠진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적극 권하고 있다. 한번은 전문가를 사무실로 초빙해 직원들을 교육한 뒤 필리핀의 한 섬으로 단체 스쿠버다이빙을 가기도 했다. 그때 시작해 취미로 삼은 직원도 몇 있다.

“일을 하다 보면 내 인생에 일이 전부인가 하는 순간이 오죠. 취미를 가지면 그럴 때 마음의 여유도 찾고 재충전할 수도 있어요. 안타까운 건 취미라고 해야 골프 아니면 등산 일색이라는 거죠.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 두 시간만 가면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잖아요. 멋진 물속을 많은 분들이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요.”

전 세계 웬만한 다이빙 포인트는 다 가봤다는 그는 또 다른 도전을 꿈꾼다. 이제 남은 단계는 북극의 아이스다이빙. “레오파드 표범이 있다는데 굉장히 무섭다고 하더라”며 “너무 위험할 것 같기도 한데, 계속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할 것 같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그다. 넘치는 열정은 올해 비즈니스 목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인 외환은행과 하이닉스 매각을 잘 마무리하는 게 급선무. 이 대표는 “지난해 크레디트 스위스가 외국계 증권사 중 순이익 1위, 브로커리지로는 6년째 1위를 했고, 주식 발행 업무도 1위를 차지하는 등 독보적 성과를 거뒀다”며 “올해도 이 같은 성과를 지속시키는 것과 함께 크레디트 스위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잘 활용해 국내 기업들에 전 세계의 좋은 매물을 소개할 수 있도록 크로스보더 M&A에 주력할 예정”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