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혁신이다  36


이병철 회장은 사업 부지를 구할 때마다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삼성SDI 부산 공장은 소문난 명당이다. 뒤로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른다. 좌청룡 우백호도 모두 갖춰져 있다. 뒤에 끼고 있는 신불산은 신(神)과 불(佛)이 같이 있으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험한 산이 아닌가. 산 위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진을 치고 주둔했다는 갈대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통도사도 가깝다. 그야말로 명당자리다. 산의 형세도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모양’인데, 이는 풍요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브라운관 사업을 시작으로 하는 사업마다 융성한 곳이 바로 삼성SDI 부산 공장이다.

하지만 처음 부산 공장에 갔을 때는 기대와 달리 큰 사고가 계속해 일어났다. 직원의 음주운전 사고나 화재 등이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인사 담당자에게 물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공장장이 바뀌면 꼭 세 번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신불산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 없어진다”는 얘기도 이어졌다. “진작 얘기하지 그랬느냐”며 호통을 치곤 바로 신불산에 올라가 임명 신고식을 치렀다. 그 이후 거짓말 같이 사건·사고가 사라졌다.

풍수지리를 믿건 안 믿건 간에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이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결속시키고 신뢰 관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면 마땅치 않더라도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한다. 신불산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의 힘이다. 소형 액정표시장치(LCD) 부문 활성화 때도 모든 조직원들이 산에 올라가 단합 대회를 열고 개선에 성공했다. 신화적 상징을 만들어 낸 것이다.



긍정의 기운을 세우다

부산뿐만 아니라 수원 공장도 이런 긍정적인 기운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광개토태왕비다. 1998년 6월에 식스시그마 1단계가 정착되고 프로세스 혁신도 1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신경영동산’을 수원 공장 입구에 만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컬러 브라운관 1000만 본을 만들어라.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산 회사가 돼라”는 목표를 세웠다. 또 하나는 이건희 회장의 비전이다. “양은 제일인데, 기술은 소니가 왜 넘버원이냐. 브라운관의 월드 베스트를 만들어라. 세계 제일의 기술을 개발하라.” 삼성SDI는 다이나트론 같은 기술로 소니를 능가하는 정상의 제품을 만들며 두 회장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회장의 월드베스트 정신을 기리는 비석, 양과 기술에서 세계 제일을 상징하는 비석을 만들자는 결정을 내린 배경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세계화를 상징하는 비석은 무엇일까. 결론은 광개토태왕비였다. 태왕비가 안테나가 돼 부산 신불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다는 스토리도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비를 세우려니 비용이 상당했다. 탁본도 한국에 없고 일본에 있었다. 그런데 수소문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삼성미술관에 이미 광개토태왕비가 보존돼 있었다. 천안 독립기념관을 세울 때 태왕비를 세우기로 했는데, 문제는 일본에서 발주해 사 가지고 온 것이었다. “어떻게 일본에서 가지고 온 것을 세우느냐”는 비판이 쏟아지자 차마 세우지 못했던 것. 이를 삼성문화재단이 사준 것이었다.

삼성미술관 쪽에 요청하니 “팔 수는 없고 빌려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신경영동산에 광개토태왕비가 세워졌다. 문안을 번역해 방문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신경영은 비단 삼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거대한 화두였다. 모든 언론들도 초기에는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 회장의 베이징 발언 이후 찬밥 신세가 되며 삼성 내부에서만 진행됐다. 오늘날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한 데 비해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아직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하는 격차를 나타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5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우리라도 뭔가 남겨야 하지 않겠나”고 해서 탄생한 것이 신경영동산과 광개토태왕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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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새로운 출발

1999년 1월 삼성SDI를 떠나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2003년 1월까지 만 4년간 기술원장으로 일했다. 1년 정도 근속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하면 최장수 기록이다. 기술원은 그만큼 바람도 많고 변화도 많은 곳이었다.

4년간의 경력 덕분에 ‘기술 경영’ 전문가가 다 됐다.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 상’도 받았다. 기계공학이 아닌, 기술 경영 전문가로 인정받고 기술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도 받은 건 모두 기술원장 시절의 일이다. 요즘도 강연 같은 대외적 활동과 한국공학한림원·한국엔지니어클럽 등 과학기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때의 경험 덕분이다.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기술원은 잘 가려고 하지 않는 기피 대상 중의 하나였다. 대부분의 경영자가 현장 최고경영자(CEO)를 선호하지 연구소의 책임자로 가는 건 마뜩찮아 했다. 하지만 필자는 기술원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릇을 만들 수 있었다. 삼성 안만 바라보던 내부 지향적 사고가 대학의 모든 전문가, 연구소 전문가들과 교류하는 열린 시각으로 바뀌었다. 또 국가의 기술 정책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굉장히 넓어졌다. 전 세계의 연구 인력과 교류하니 네트워크의 틀도 넓어졌다. 인생을 크게 구분하자면 경영자로서의 인생과 기술원 이후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

기술원에 처음 갔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게 있다. 당시 삼성그룹 전체의 기술 인력은 3만 명에 달했는데, 기술원은 고작 1000명에 불과했다. 3만 명 중 1000명이 ‘나만 잘해야겠다’고 생각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기술원이 코어(core) 역할을 하자. 그래서 3만 명이 성과를 낼 수 있는 ‘씨앗 기술’을 제공하자. 이를 위해 각 관계사들과 협력하고 기업에 속한 연구진이 기술원에 와서 공동으로 연구하고 성과도 내야 한다. 즉 ‘플랫폼’의 역할을 하자는 게 복안이었다. 3만 명이 잘하게 할 수 있는 중심점, 즉 기술원을 삼성그룹 모든 연구의 융합과 시너지의 구심점으로 만들자고 결심했다.

1년에 한 번 여는 ‘삼성기술전’을 기회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룹의 모든 관계사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고 벤치마킹하는 자리다. 이때 기술원의 ‘오픈 하우스’를 기획했다. 기술원의 비전·성과·목표를 공유하는 장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기술원 안에는 ‘무한탐구관’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 있다. 기술원이 뭘 해왔고 뭘 하는지 성과를 보여주는 곳이다. 예를 들어 나노 기술은 어떻게 발전하고, 세계에서 제일 발전한 기업은 어디이고, 우리는 어느 수준이고, 언제까지 발전해 그룹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로드맵을 보여주는 식이다. 연구원들이 이를 1년에 한두 번씩 고치며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세웠다. 관계사의 CEO들을 모시고 설명회도 열었다.

기술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 사의 핵심 역량을 제고하게끔 하는 것이다. 연구·개발의 길은 이런 것이고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여기까지 가겠다는 것을 안내하는 역할이다. 이를 위해선 기술원과 관계사가 서로 믿고 신뢰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CRO 제도를 만들게 된 배경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신경영동산에 광개토태왕비 세운 까닭
CRO는 ‘최고관계(소통)책임자(Chief Relationship Officer)’의 영문 첫 글자를 딴 것이다. 기술원 안에 있는 분야별 연구 책임자(전무, 부사장급)를 CRO로 임명했다. 이들에게 관계사와의 연계 활동을 위한 창구 역할을 맡겼다. 분기별로 순회하며 고객(관계사)과 만나 “우리는 이렇게 연구하고 있고 귀사에서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부터 기술원은 ‘따로 조직’이 아니라 함께하는 조직, 즉 융합과 시너지의 플랫폼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