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회장의 리더십

지난 2월 10일 롯데그룹 사령탑에 오른 신동빈(56) 회장은 첫 출장지로 인도네시아를 골랐다. 2004년 그룹 컨트롤 타워 격인 정책본부 본부장을 맡으면서 1년의 절반은 세계 각지를 돌며 보내온 그에게 해외 출장이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그런 신 회장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2월 22일 자카르타 교외 보고르에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만난 신 회장은 50억 달러를 투자해 자바섬 서쪽에 대규모 석유화학 기지를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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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신 회장이 추진하는 글로벌 전략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룹 내에서 브릭스는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가 아니라 ‘VRICs(베트남·러시아·인도네시아·중국)’로 통할 정도다. 신 회장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직접 만들어낸 신조어다.

롯데는 2008년 현지 대형 마트인 마크로를 3900억 원에 인수하는 등 인도네시아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늘려왔다. 신 회장 주도로 2009년 발표한 ‘비전 2018 (2018년까지 그룹 매출 200조 원 달성)’을 현실화하려면 롯데의 해외 사업은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커져야 한다.

직접 해외 IR…롯데쇼핑 상장 주도

신 회장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글로벌 감각에 높은 점수를 준다. 롯데의 자문 교수를 지냈고 2001 신 회장과 함께 공동 저서(‘유통을 알면 당신도 CEO’)를 내기도 한 오세조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선진국인 미국·일본·유럽을 두루 경험한 때문인지 글로벌화된 시각과 마인드가 뛰어나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 회장은 1955년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칠 때까지 줄곧 일본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에서 MBA 과정을 밟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 행보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신 회장을 노무라증권에 평사원으로 입사시켜 런던지점으로 보냈다. 이에 따라 신 회장은 ‘금융 빅뱅’이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 런던 금융가의 다이내믹한 변화를 직접 목격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런던에서의 7년은 신 회장에게 값진 자산이다. 금융은 산업을 움직이는 혈맥과 같다. 긴박한 글로벌 금융 현장을 뛰면서 기업 가치를 평가하고 산업의 흐름을 읽는 능력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된 것이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을 비롯한 명문가들이 후계자들을 필수 코스로 뉴욕과 런던의 금융사에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 중심지에는 돈과 네트워크가 모인다. 신 회장은 “당시 같이 일했던 펀드 매니저들이 (주요 금융사의) 사장, 회장이 돼 있다”고 말했다.

1988년 일본 롯데상사에 입사해 일하던 신 회장은 2년 만인 19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호남석유화학은 롯데그룹의 주력사업과 거리가 있는 석유화학 분야의 ‘나 홀로 계열사’에 불과했다.

더구나 합자 파트너인 일본 미쓰이가 빠져나가면서 경영 위기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신 회장은 증시 상장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1991년 5월) 상장을 해서 자금을 마련하고, 그 자금으로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합병(M&A)해 회사를 키워나갔던 게 많은 공부가 됐다”고 말했다.

신 회장(당시 상무)은 현재 롯데그룹의 M&A를 이끌고 있는 황각규 정책본부 국제실장(당시 부장)을 이때 처음 만났다. 1995년 신 회장은 그룹기획조정실 부사장으로 가면서 기조실 산하에 국제부를 새로 만들면서까지 황 실장을 데려갔다. 이때부터 그는 16년간 신 회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해 왔다. 2006년 롯데쇼핑 상장으로 시작된 대혁신의 밑그림과 인맥이 호남석유화학 시절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실패의 아픔도 있었다. 2000년 벤처 붐을 타고 무선 인터넷 콘텐츠 업체 모비도미와 온라인 쇼핑몰 롯데닷컴을 설립해 직접 대표이사를 맡았다. 화려한 출발과 달리 모비도미는 사업이 지부부진해지면서 결국 2003년 롯데닷컴에 흡수 합병됐고 롯데닷컴도 상당 기간 부진을 면치 못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을 운영하는 코리아세븐은 신 회장이 남다른 애정을 쏟는 계열사 중 하나다. 2001년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던 책도 일본과 한국에서 세븐일레븐의 성공 사례를 분석한 내용이었다. 출범 초기 승승장구하던 세븐일레븐은 보광훼미리마트와 GS25에 밀려 지금은 업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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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업 한국 롯데로 일원화

신 회장은 2004년 정책본부장에 오르면서 그룹 운영을 총괄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이때 그가 꺼내든 카드가 주력 계열사 롯데쇼핑의 주식공개(IPO)였다. 롯데는 전통적으로 외부 자금 유입을 금기시하는 폐쇄적인 경영 방식을 고수해 왔다.

2004년 당시 롯데의 36개 계열사 중 상장사는 5개(롯데미도파·롯데삼강·롯데제과·롯데칠성·호남석유)뿐이었다. 주식공개는 기업 체질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관건이었다.

다행히 주식 상장으로 결론이 나면서 추진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런던증권거래소와 한국거래소 동시 상장이 결정됐다. 신 회장은 런던과 파리를 돌며 열린 투자 설명회(IR)에서 직접 마이크를 들고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에 나서 투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노무라증권 런던지점 시절 쌓은 인맥도 큰 도움이 됐다. 2006년 2월 IPO로 조달한 3조5000억 원은 이후 롯데그룹의 급성장을 가능하게 한 소중한 자금줄이 됐다.

금융에 정통한 신 회장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롯데쇼핑을 상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경험이 부족한 실무자들이 실적을 부풀려 발표하자 이를 발견한 신 회장은 호된 질책을 쏟아냈다.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2007년 가을부터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번져갈 것이라고 예견했다. 2008년 초 운영 자금을 미리 확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에 따라 호텔롯데를 비롯한 계열사들이 발빠르게 외화 표시 회사채를 발행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금융 위기로 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화됐지만 롯데는 미리 확보한 운영자금 덕에 무난하게 글로벌 금융 사태에 대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롯데의 변화에서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글로벌화다. 일본 롯데가 독자적으로 추진해 오던 제과 관련 해외 사업도 한국 롯데로 일원화하기로 해 신회장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신 회장은 대기업 오너에게 보기 드문 소탈한 면모도 갖고 있다. 실무자들에게 직접 보고를 받고, 직원들에게는 꼬박꼬박 경어(敬語)를 쓴다. 해외 출장이 없을 때는 아침 8시 30분께 혼자 서류 가방을 들고 출근해 일반 직원들과 똑같이 만원 엘리베이터에 올라 26층 집무실로 향한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