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다시 불러보는 ‘윤 兄’
윤 형(兄),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입니다. 부자간의 관계라고 보기엔 너무 건방진 아버지에 대한 호칭이지만 우리 부자끼리는 너무 자연스러운 호칭입니다. 대학교 때부터인가요.

윤 형이 들려주신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은 조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던 저에겐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1980년대에 풍미했던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에 6·25란 큰 사건으로 할아버지를 잃으신 아버지의 증언이 더해져 아들이 원래 꿈꿨던 외교관의 길을 버렸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용서의 언어가 윤 형이었던 것 같아요.

광복 전후 진보적인 길을 걸으신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을 법도 할 터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YS(김영삼) 지지자로서 윤 형은 아들과 보다 많은 얘기를 해 보고 싶은 바람에서, 한편으론 당신이 못 가졌던 할아버지와의 교감에 대한 회한 때문에 윤 형이랑 호칭으로 부르도록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윤 형께서는 1960년대 고학 끝에 당시 아주 큰 섬유회사에 취직하시어 산업 역군이 되길 희망했지만 3년도 안 돼 온몸에 화상을 입고 사회로부터 퇴출 아닌 퇴출을 당하셨지요.

그런데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 아들이 정확히 40년 후 교통사고를 당해 2년간 병상 생활했던 것에 대해 혹시 당신의 잘못 낀 단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고뇌하던 모습을 보았다고 이제야 고백합니다.

윤 형, 제가 어린 시절이었던 1970년대 초 불편하신 몸으로 운수업에 투신하신 후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인사 사고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려운 고통을 자초하셨지만 결국 재기해 1980년대 축산업에 투신하면서 노후 걱정은 안 시키겠다는 출사표를 던지셨던 것 기억하시지요.

축산업은 부동산업이란 진리를 모르실 리 없지만 땅을 사기보다 소, 돼지와 함께 여생을 준비하신 순진한 우리 아버지 윤 형은 축산파동으로 다시 실의에 빠지셨을 때 판검사나 외교관이 될 아들을 그리시며 아들에게 친구처럼 윤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 같아요.

윤 형, 아들의 마음속에는 칠순이 넘은 윤 형이 아직도 젊다고 착각해 늘 많은 요구를 하곤 합니다. 며칠 전 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것 기억하시죠.

표지판을 잘못 읽어 제가 좀 기다리게 되었을 때 친구를 대하듯 화를 내던 아들에게 허허 웃으면서 “인천공항에 차 몰고 온 것은 처음이라 다시 ‘도착’으로 돌아오는 길을 잘못 들지 않으려고 잠시 내려 길을 물어봤다”는 윤 형을 예전과 같은 젊은 아버지로 대하고 싶어 하는 아집을 버릴 수가 없군요.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도 윤 형은 뭐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지만 아들이 좋아하는 후보를 어머니까지 설득하시어 찍어 주는 용단을 내렸지요. 드러내 놓고 말씀은 못드렸지만 마음 속 깊이 윤 형의 따스한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윤 형, 얼마 전 부동산으로 돈버는 비결을 묻는 지인에게 첫째 입지, 둘째 입지, 셋째도 입지라는 우문현답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지요.

아들에게 스포츠 마케팅 성공의 세 가지 비결을 누가 묻는다면 첫째는 사람관계, 둘째는 인간관계, 셋째는 인적 네트워크라고 대답하곤 하는데 결국 사람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도록 만든 분이 바로 윤 형이란 친근한 호칭을 허락해 주신 아버지인 줄은 모르셨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남 탓을 하지 않고 균형을 잡으며 모두와 이익을 나누어 공생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신 은혜를 스포츠 마케팅이란 열악한 분야에서 민간 외교관이 되어 사회에 보답하려고 하는데, 저의 영원한 젊은 아버지 윤 형,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나의 아버지] 다시 불러보는 ‘윤 兄’
윤석환 IB스포츠 부사장


1960년대 후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쭉 10대를 보내고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90년대 초반 OCI에 입사해 국제영업부, 싱가포르 지사, 회장 비서를 거치며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