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발 금융 위기 숨겨진 ‘뇌관’ 있다
그리스에서 촉발된 금융 위기가 지난 5월 10일 7500억 유로라는 막대한 구제금융 조성 소식에 일단 안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비관론이 여전히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상품 투자 전문가인 짐 로저스 등 월가의 일부 전문가들은 “유로존의 구제금융은 대상국들의 채무 부담을 늘리며 결국 유로존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며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하면 사태는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1997년 이후 한국이 IMF 구제금융의 요구를 성공적으로 지켜낸 것처럼 그리스·포르투갈 등이 긴축재정을 통해 재정 적자를 약속대로 줄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맞은 빨간 신호등이어서 전 세계는 더욱 바짝 긴장하며 예의 주시하고 있다. 유럽의 위기는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불씨가 살아나 산불로 번질 것인가.

역사상 화폐의 등장 이후 처음 은행이 생기고 주식 등이 만들어지면서 오늘날의 금융 시스템이 구축되는 데 대략 500년 정도가 걸렸다. 이 가운데 심각한 경제 위기는 마치 허리케인처럼 반복적으로 세계를 강타해 왔고 현대사회 들어 점점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세계사에서 최초의 국가 부도 사태는 1557년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까지 장악한 거대한 왕가가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필요로 했고 이탈리아와 독일의 은행들은 왕가와 결탁해 끊임없이 자본을 공급했다. 결국 대규모 국가 부도 사태를 맞았고 은행들의 어떤 채권도 효력이 없게 됐다. 같은 해 프랑스마저 심각한 금융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450년이 지난 현재 그때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 관계가 촘촘한 유럽의 국가들이 도미노식 국가 부도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난 2009년 10월부터 그리스 사회당 신정부가 2009년 예상 재정 적자를 종전의 6%가 아니라 12.7%라고 발표하면서 위험 경고등이 켜졌다. 이후 유로존의 재무부 장관들이 모여 다양한 지원 방식을 논의해 왔지만 시장의 불안은 커져 왔다.

애초에 그리스에 대한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공동 구제금융의 지원 규모는 450억 유로였다. 하지만 유럽의 지도자들은 그리스 파산이 가져올 파장이 예상보다 위협적이란 것을 깨닫자 지난 5월 1일 1100억 유로로 확대했다.

하지만 그리스발 남유럽 금융 위기가 예상과 달리 최근에 포르투갈 및 스페인으로 옮겨가는 등 오히려 위기감이 확산되자 지난 5월 10일 전격적으로 무려 7배나 늘려 7500억 유로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래도 PIIGS(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국가들의 금융 위기가 해소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전히 불안감은 씻기지 않았다. 로이터통신 등 해외 언론은 “EU는 재정안정기금으로 시간을 샀을 뿐”이라며 “유럽 국가들이 경쟁력을 높이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회의론이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U와 IMF는 구제금융의 대가로 그리스 등의 국가에 강력한 긴축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 의회는 요구를 받아들여 GDP의 14%에 달하는 재정 적자를 올해 말 6.5%로 낮추고 2014년까지 GDP의 3%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는 각종 세금 인상, 사회복지 지출 규모 축소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의 재정 적자를 일시적으로 줄일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경제를 위축시켜 세금 수입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재정 적자를 채우기 위해 높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하면 시중 금리가 덩달아 급등해 가계와 기업의 부실을 야기, 결국 경제 전체를 악화시켜 국가 채무 불이행(디폴트) 사태에 빠질 수 있다.
유럽발 금융 위기 숨겨진 ‘뇌관’ 있다
‘단지 시간만 샀을 뿐이다’

2003년 3월 IMF 구제금융을 지원받고도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은 아르헨티나가 그랬다. 미국 월가의 대표적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GDP 대비 13.6%에 달하는 그리스의 재정 적자를 3%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과제는 ‘불가능한 임무(mission impossible)’로 보인다”면서 더 나아가 그리스 사태의 후유증으로 유로화 시스템이 향후 수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번 유럽 금융 위기가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한경비즈니스는 경제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답변은 국내 실물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일단 제한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내 수출액의 유럽 비중이 낮고 한국의 재정 상태와 경제성장세가 비교적 양호하기 때문이라고 근거를 제시했다.

그리고 PIIGS 국가들로부터 차입 또는 주식·채권 등을 통한 자금 유입이 극히 적은 규모이기 때문에 한국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도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럽 금융 위기에 따른 환율 변동성이 커질 것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유럽발 금융 위기는 예상보다 심각했지만 비교적 신속한 정책 대응에 힘입어 한고비를 넘긴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운 사안이므로 이후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의 경제와 재정이 개선되는 신호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려가 해소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7500억 유로 긴급구제금융 조성 이후 EU 각국이 긴축안을 속속 내놓으며 위기 진정에 나서고 있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제2의 그리스’로 거론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잇따라 긴축안을 마련했고, 영국은 65년 만에 첫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긴축에 박차를 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에서 긴축으로 인해 임금이 삭감되고 세금이 늘어나는 데 대해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어 유럽 각국은 한동안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위기를 맞고 있는 유럽의 국가 중 하나라도 재정 적자를 줄이는 데 실패하면 ‘도미노의 공포’는 세계를 향해 시작될 수 있다.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