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니스트 김동범
학생들을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사람들도 만나지만 역시 가장 좋아하는 일은 ‘카툰’을 그리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사람을 그리다 보니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카투니스트가 있다. ‘똥개’ 김동범이다.슥슥~. 편하게 쉽게 그려진 듯한 그림 속 광경 하나가 마음에 스며든다. 그림 밑의 짧은 언어가 마치 시처럼 눈동자에 아로새겨진다. 보는 건 쉽지만 쉬이 떨쳐버리지 못하는 따뜻한 감성으로 무장한 그의 카툰은 쉽지만 어렵다. “다들 비슷한 말씀들을 하세요. 쉽지 않다고. 그런데 그건 카툰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이기도 해요. 아주 불친절한 그림, 그게 바로 카툰이죠.”
한 장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일러스트와 카툰을 비슷하게 보는 이들도 많지만 일러스트가 하나의 장면, 하나의 상황을 그린 그림이라면 카툰은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는 얘기다.
“단 한 장의 그림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을 함축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게 바로 카툰이에요. 그만큼 작가로서는 오랜 고민이 필요한 일이고 그만큼 독자가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인 셈이죠.” 현실적으로는 카툰을 그릴 수 있는 잡지 매체가 많이 줄어들고 또 특정 캐릭터가 있거나 연재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대표작이 뭐예요?”, “대표 캐릭터가 뭐예요?”, “어떤 그림을 그려요?”라는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다. 이렇다 할 정도로 대접받는 직업도 아니다.
한 컷의 스케치에 담은 세상과 사람 이야기 한 컷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너무 사랑한다. “사실 카툰만 그려서는 먹고 살기 힘들죠.(웃음)
그래서 지금도 카툰을 그리는 일 외에도 학생을 가르치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일을 하죠.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면 새삼 깨닫게 되곤 해요. ‘아, 내가 정말 카툰을 좋아하는구나’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몸이 약했던 아이였다. 죽지 말고 오래 튼튼하게 살라고 부모님께서 지어준 이름이 바로 ‘똥개’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그의 지인들은 너무도 멀쩡한 그의 이름 대신 ‘똥개야’라고 그를 부른다. 그만큼 그 역시 그 이름을 아끼고 사랑한다.
“저를 위한 사랑이 가득 담긴 이름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도 없지 않겠어요?” 어려서부터 늘 무언가를 끼적거리는 일이 좋았다. 학교에 다닐 때도 교과서와 공책은 공부를 위한 책이 아닌 그의 뻗어나가는 공상의 나래를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스케치북이었다.
“이상하게 수업 시간만 되면 그림에 훨씬 더 잘 집중할 수 있던데요?”(웃음) 낙서를, 만화를 좋아하는 만큼 대학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2000년부터 각종 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김동범’이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만화도 그려봤고 캐릭터 디자인도 해 봤고 애니메이션 감독도 해 봤죠. 하지만 계속 하고 싶었던 건 역시 카툰이었어요.”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카툰에 집중했다. 사람을 그리기 위해 사람을 공부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그러다 보니 사람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자신만의 그림으로 세상에 말을 걸었다. 마치 등을 서로 기대고 앉은 오래된 친구의 속삭임처럼 조근조근, 그렇게 말을 걸었다. 오랜 고민과 생각을 거쳤기에 더욱 진솔하게 다가오는 그의 이야기에 세상은 귀를 기울여 주었고, 더 많은 이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를 바라게 됐다.
그 덕분에 2006년부터 그는 다수의 국제 카툰 페스티벌에서 수상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는 젊은 카투니스트로 조금씩 명성을 얻었다. “사람을,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나오는 따뜻한 감성의 카툰 작가”로 유명세가 따랐고 개인 전시회도 성황리에 열렸다.
또한 그의 그림을 원하는 이들도 많아졌고 학교에서 강의하는 일도 늘어났다. 속칭 ‘잘나가는’ 시절이 계속됐다. 하지만 바쁘면 바쁠수록, 그리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텅 비어 가는 자신이 보였다. 자신을 찾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김동범’이라는 사람은 점점 없어져 가는 듯했다.
“그래서 그저 펜 한 자루와 스케치북, 그리고 딱 필요한 여행 경비만 들고 네팔로 향했죠.” 2007년 12월부터 시작된 50일간의 네팔 여행은 그에게 커다란 배움의 기회였다. 사실 2006년부터 각종 국제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아 외국 여행을 자주 가곤 했었다.
여행 속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은 늘 그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곤 했었다. “처음에는 1주일, 그 다음에는 열흘, 그 다음에는 2주일, 이런 식으로 여행 기간을 점점 늘리곤 했다. 그런데 머무르는 기간이 늘면 늘어날수록 여행이라는 느낌보다 마치 그곳에 살고 있다는 ‘생활’의 느낌이 더해지거든요. 전혀 다른 세상에서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죠.” 처음에는 히말라야를 보고 싶어 택한 네팔이었다. 강의와 온갖 스케줄들까지 모두 접은 채 떠난, 어찌 보면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히말라야를 보러 간 그곳에서 그는 ‘사람’을 만났다.
선한 웃음을 머금은 착한 사람들, 길 잃은 나그네에게 선한 친절을 베풀고, 낯선 이의 그림 선물 한 장에 세상 전부를 다 얻은 듯 행복해 하던 네팔의 사람들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 철학의 원천이 됐다.
50일간의 행복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네팔에서의 경험과 생각들, 네팔 사람들의 그 맑은 눈동자와 선한 웃음들은 오래도록 진한 잔상을 남겼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2년여 전 그가 네팔에서 겪었던 경험과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고 그때 그렸던 스케치들로 책을 내기도 했다. 책을 출판하면서 함께 연 전시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리고 그가 네팔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과 사랑을 선뜻 나누어 가져갔다.
“전시회는 더 많은 분들에게 제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어 여는 것이긴 하지만 그 전시회를 통해 더 큰 배움을 얻게 되는 건 정작 제 자신인 것 같아요.” 그 중 네팔을 다녀온 후 열었던 두 번째 개인 전시회에서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어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우는 우리 시대의 사랑 이야기를 다양하게 그려낸 ‘러브야’라는 이름의 전시회였다. “러브야(LovYa)는 ‘러브(LOVE)’와 ‘유(YOU)’의 합성어로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기도 해요. 러브야는 또한 구름을 의인화한 캐릭터로 아직까지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사랑해 주시는 대표적인 카툰 캐릭터이기도 하죠.”
어느 날, 그 전시회의 관람객 중 한 사람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20분 동안 한 작품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뚫어져라 작품만 보고 있던 어느 부인이었다. 그 관람객은 다음날도 전시회를 찾았고 그 작품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사연을 묻는 그에게 그 관람객은 아들이 장애를 앓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아들을 계속 안고 사는 것이 너무 힘에 겨워 그만 놓아버릴까 생각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제 작품을 보고 다시 살아갈 희망이 생겼다며 펑펑 우시더라고요. 앞으로도 힘들 때마다 그림을 보고 싶다고 팔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그림 값을 감당하기에는 그리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보였다.
“결국 그냥 선물로 드렸어요.그분은 제 그림을 통해 희망을 얻으셨다고 했지만 저 역시 그분을 통해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보람을 얻었거든요.” 한 컷의 그림이 가지는 파장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제가 하는 일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됐죠. 앞으로도 카툰을 통해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도 나누고 싶습니다.”
김동범 카투니스트 : 1978년생.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과 졸업. 2005년 데일리 줌 신인 만화 공모전 우수상. 2006년 시리아 국제 카툰 페스티벌 특별상, 영국 브래드퍼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초청 상영,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 카툰부문 우수상. 2007년 터키 국제 카툰 페스티벌 특별상. 저서: ‘네팔스케치포엠-가끔은 길을 잃어도 괜찮아’.
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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