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확장 가능한 ‘아이폰 생태계’

2009년 11월 28일 한국에 공식 출시된 아이폰은 불과 열흘 만에 가입자 10만 명을 가뿐히 넘어섰다.

출시 1개월이 지나자 이용자는 20만 명을 넘어섰고, 다시 한 달이 지나면서 30만 명이 아이폰을 손에 넣었다. 올해 3월 기준으로 아이폰 이용자는 40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궁금하다. 왜 아이폰에 열광하는 것일까. 아이폰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

무선 시장에선 하나은행이 ‘위너’

지난해 12월 10일 아이폰용 하나은행 뱅킹 응용프로그램 ‘하나N뱅크’가 나왔다. 아이폰이 공식 출시된 지 보름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이날은 스마트폰용 뱅킹 서비스가 한국에서 본격 시작한 날로 기록될 모양이다.

‘하나N뱅크’는 예금 조회와 환율 펀드 조회, 신용카드 조회 및 현금서비스, 펀드 환매 요청, 계좌이체(송금) 등의 금융거래 서비스를 아이폰으로 제공한다. 머잖아 펀드 예금 및 대출, 펀드 상품 가입 등도 제공할 예정이다.

금융권에서 가장 발 빠르게 ‘아이폰 경제권’에 진입한 하나은행은 톡톡히 ‘아이폰 효과’를 체감했다. 3월 21일 기준으로 ‘하나N뱅크’ 응용프로그램 다운로드 건수는 6만887건(업데이트 제외)에 이르며 하루 2000여 명(이체 기준)이 ‘하나N뱅크’에 접속해 금융거래를 하고 있다.

지난 2월 내놓은 무료 가계부 프로그램 ‘하나N머니’는 이 같은 인기에 기름을 부었다. 3월 21일 기준으로 8만6659건의 다운로드 수를 기록해 하나은행을 함박웃음 짓게 했다.

여기에 ‘스마트폰 금융 서비스 강자’란 이미지까지 덤으로 얻은 점을 감안하면 하나은행이 아이폰 응용프로그램으로 얻은 가치는 더욱 커진다.

전통 금융권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밀리던 입지를 모바일 경제권에선 확실히 우위를 잡은 셈이다.

이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정보 단말기로서의 한 예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그저 예쁘고 성능 좋은 스마트폰이기 때문에 아이폰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이폰은 쓸만한 스마트폰에 그치지 않는다.
기존 IT 기득권 고집하면 ‘루저’ 된다
아이폰을 빛내는 건 단말기 성능이나 사양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애플리케이션’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응용프로그램들이 아이폰을 팔색조로 변신시킨다. 어떤 아이폰을 쓰느냐는 이용자에 달렸다. 휴대전화 기능 선택권을 이용자에게 넘긴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이폰 생태계’다. 아이폰 기능을 바꾸고 싶다면 ‘애플 앱스토어’를 방문해 보자. 원하는 기능을 오롯이 담은 응용프로그램이 지천이다. 음악을 소비하는 습관부터 달라진다.

휴대전화에 내장된 뮤직 플레이어에 굳이 만족할 필요는 없다. 커피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떤 곡인지 궁금하다면 마이크에 음악을 들려주기만 해도 음악 제목을 검색해 주는 응용프로그램을 설치하면 된다.

내장된 카메라 성능과 기능을 확장해 주는 응용프로그램만도 수십 종류에 이른다. 처음 손에 넣었을 땐 아이폰이되, 쓰임새에 따라 나만의 정보 단말기로 변신하는 건 순식간이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폐쇄된 모바일 시장이 아이폰 도입을 시작으로 봇물처럼 터진 덕분이다. 지금까지 휴대전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제조사가 만들고 이동통신사가 허용한 기능들만 수동적으로 받아쓰는데 그쳤다.

소비자가 어떤 기능을 원하는지 결정하는 몫은 이동통신사였다. 정작 소비자는 이통사가 주는 대로 받아쓸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기능에 목말라 있어도 이통사가 해당 기능을 추가해 주지 않으면 달리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아이폰은 이런 시장구조를 바꿨다. 휴대전화 단말기를 고르는 기준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바꾼 것이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응용프로그램들은 아이폰을 전혀 새로운 기기로 변신시킨다.

전 세계 4000만 아이폰 이용자들이 모여 있는 애플 앱스토어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모여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른바 대박 낸 응용프로그램은 개발자 이름도 드높이고 주머니도 덤으로 채워 줬다. 뛰어난 상품들이 모여드는 장터는 흥청거리게 마련이다. 다른 장터를 들락거리던 상인들도 자연스레 돈 흐름을 따라 큰 장터로 모여들게 된다.

요컨대 ‘소프트웨어·콘텐츠 생산자와 소비자 참여 확대→ 오픈마켓 활성화→ 소프트웨어·모바일 시장 창출→ 관련 산업 발전’이란 선순환 생태계가 형성되는 셈이다.

왜 이런 공을 오롯이 아이폰에 돌리는 걸까. 이전에도 스마트폰은 존재했지만 문제는 생태계였다.

‘윈도 모바일’이나 ‘팜OS’같은 모바일 운영체제(OS)를 탑재한 스마트폰은 소수 얼리어답터에겐 인기를 끌었지만 대중이 머무르는 지상까지 내려오지는 못했다. 대중에 맞는 풍성한 응용프로그램들을 제공하지 못한 탓이다.

애플은 울타리를 치고 자체 장터를 만든 대신 풍성한 상품들을 진열대에 올려 상인들의 욕구를 채워줬다. 2010년 2월 기준으로 애플 앱스토어에 등록된 응용프로그램 수는 15만 개를 넘어섰다. 기왕 장을 볼 요량이면 동네 구멍가게보다 쓸만한 물건들이 널린 대형 마트에 눈을 돌리는 건 인지상정 아닌가.

아이폰 도입 4개월째. 한국 경제도 지각변동 조짐이 보인다. 이통사 무인도에 고립돼 있던 ‘갈라파고스(무인도를 뜻함)’ 모바일 시장이 쇄국 빗장을 풀고 개방 물꼬를 튼 덕분이다.
기존 IT 기득권 고집하면 ‘루저’ 된다
KT경제경영연구소가 올해 2월 내놓은 ‘아이폰의 사회경제적 파급효과 분석’ 자료에 따르면 국내 정보기술(IT) 산업은 아이폰이 가져온 시장 개방 효과에 힘입어 2조6000억 원의 추가 시장을 만들어낼 전망이다.

모바일 오픈마켓이 커지면서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시장은 지금보다 4700억 원가량 커질 전망이며 응용프로그램 사용이 늘어나고 전용 요금제 도입으로 1조9000억 원 규모의 무선 데이터 시장이 새로 생겨날 것으로 예상된다.

2012년이 되면 변화는 더욱 뚜렷해질 전망이다. 2009년 말 1.6%대에 불과한 스마트폰 보급률은 2012년께면 17.5%로 치솟을 전망이며 스마트폰 가입자 수도 10배 이상 늘어난 885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 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는 아이폰이 도입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 앞으로 3년간 550만 대의 스마트폰 시장이 추가로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존 비즈니스 기득권 갈수록 약해져

기업들의 ‘아이폰 러시’는 이미 가속도가 붙었다. 금융권에선 하나은행에 이어 기업은행·동양증권·미래에셋·신한은행 등이 잇따라 아이폰용 응용프로그램을 내놓으며 모바일 금융 서비스 쟁탈전에 가세했다.
기존 IT 기득권 고집하면 ‘루저’ 된다
온라인 장터인 G마켓, 인터넷 서점 예스24 등도 결제 기능이 포함된 아이폰용 응용프로그램으로 상한가를 치고 있다.

소리바다·벅스·엠넷 등 음악 서비스는 PC용 웹브라우저 울타리를 넘어 아이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골라 듣는 시대를 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10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 건수를 기록하며 일찌감치 연착륙에 성공한 모양새다.

아이폰은 숙제도 동시에 남겼다. 무엇보다 모바일 결제 장벽을 허무는 일이 시급하다. ‘액티브X’란 플러그인 방식의 공인인증서 시스템 중심으로 이뤄진 인터넷 뱅킹은 모바일 웹에선 무용지물이다. 실제로 공인인증서 방식의 금융거래는 보안에 큰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지구촌은 이미 모바일 네트워크를 타고 활발히 상거래를 주고받고 있다. 어렵사리 모바일 시장을 열어 놓고 또다시 두 눈 뜨고 뒷걸음질하는 일을 반복해선 안 된다.

이희욱 블로터닷넷 기자 asadal@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