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M&A 시장에 훈풍

글로벌 금융 위기와 경기 후퇴로 꽁꽁 얼어붙었던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 ‘봄기운’이 돌고 있다. 위기 때 돈주머니를 꽁꽁 틀어쥐고 있던 기업들이 경기 회복에 대한 신뢰가 살아나면서 ‘곳간’에 가득 쌓아 놓은 현금을 들고 본격적인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기 회복 속도가 빠른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신흥 시장이 새로운 M&A 격전지로 부상하고 있다.

◇ M&A 작년에 비해 10% 늘어 = 영국 보험사 푸르덴셜의 AIG 아시아 자회사 AIA 인수(355억 달러), 독일 제약사 머크의 미 바이오테크 장비 업체 밀리포어 인수(60억 달러), 시장 분석 업체 MSCI의 위험관리 전문 회사 리스크메트릭스그룹 인수(16억 달러).

지난 3월 1일에만 시장에 3건의 주요 M&A가 발표됐다. 일본의 2위 제약 업체인 아스텔라스가 미국 제약 업체 OSI파마수티컬에 대해 적대적 인수(35억 달러)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어 3일엔 세계 최대 제약사 화이자가 30억 유로(약 41억 달러)를 들고 세계 5위 제네릭(복제약) 제약사 라티오팜 인수전에 뛰어들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AIG는 AIA 매각에 이어 또 다른 자회사인 알리코를 경쟁사인 메트라이프에 155억 달러를 받고 넘겼다. 이 밖에 미국 약국체인 월그린의 경쟁사 듀앤리드 인수(10억8000만 달러), 코카콜라의 보틀링 업체 코카콜라엔터프라이지스의 북미사업부 인수(123억 달러), 세계 최대 유전 개발 서비스 업체 슐럼버거의 유전 개발 장비 업체 스미스 인터내셔널 인수(113억 달러), 미 최대 컴퓨터 메모리 업체 마이크론의 플래시 메모리 전문사 뉴모닉스 인수(12억7000만 달러) 등 올 들어 정보기술(IT)·에너지·제조업 부문 등에서 굵직굵직한 계약들이 이어졌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3월 3일까지 발표된 글로벌 M&A 규모는 3950억 달러.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가량 증가했다.

◇ 美 기업 현금 보유 1조 달러 육박 = 기업들이 M&A 시장의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그동안 투자에는 몸을 사리면서 위기에 대비한 구조조정을 통해 막대한 현금을 비축해 뒀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에 편입된 382개 비금융 회사들의 현금 보유 규모는 지난해 4분기 총 9320억 달러(단기 운용 포함)에 달했다. 이는 전 분기에 비하면 8%, 전년 동기 대비 31% 늘어난 수준이다.
아시아 신흥국 새 격전지로 부상
특히 정보기술(IT) 업종의 현금 보유액이 많아 전체의 37%를 차지했다. 이처럼 현금이 많기 때문에 M&A 때도 주식 교환보다 현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1, 2월에 이뤄진 M&A 가운데 현금으로만 이뤄진 M&A가 전체의 50%를 차지했다.

M&A 시장에서 사모 펀드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골드만삭스 등 투자은행들이 다시금 ‘돈줄’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WSJ는 투자은행들이 매각 대상 기업들에 자문해 주면서 잠재적인 매수자에겐 돈을 빌려주는 일명 ‘스테이플드 파이낸싱(Stapled-Financing)’도 재개되고 있다고 전했다. ‘스테이플드 파이낸싱’은 대출 조건이 통상 M&A 계약서 뒤에 스테이플로 부착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亞 신흥국 M&A 신시장으로 부상 = 최근 글로벌 M&A의 특징은 신흥 시장 기업과 관련된 계약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급성장하는 신흥국 기업이 자국 내 또는 다른 신흥국의 기업 인수에 나서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등 서구 기업들 또한 새로운 성장 기회를 노리고 신흥 시장에 발을 뻗고 있다.

반대로 신흥국 기업들이 싼값에 매물로 나온 선진국 기업들을 노리는 경우도 늘고 있다. 올 들어 인도의 통신 회사 바르티에어텔은 쿠웨이트 통신 회사 자인의 아프리카 사업 자산을 107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또 인도 최대 기업 릴라이언스인더스트리스는 파산 상태에 있는 네덜란드 소재 미국 석유화학 기업 라이온델바젤을 145억 달러에 인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올 들어 발표된 M&A 중 신흥국이 인수 대상이거나 인수 주체였던 계약은 전체의 34%인 135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영국 푸르덴셜보험의 AIA 인수 건을 제외한 것으로 이를 합치면 신흥 시장 비중이 43%로 높아진다. 골드만삭스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데이비드 비니어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신흥 시장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