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가수

창의성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부단하게 노력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처럼 많은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다른 선수들의 노력이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분명 누군가에게는 훈훈한 감동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가수 이병철은 이제 갓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가수이지만 더 큰 무대의 챔피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가 들고 나온 1집 솔로 앨범의 타이틀은 ‘머니(Money)’. 돈에 웃고 돈에 우는 지금의 세태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타이틀곡 ‘돈에 미쳤어’를 부르기까지 그의 인생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가명보다 본명이 가슴에 와 닿는대요’
조영구와 18년 막역지간

이병철은 “잡초 같은 생명력은 6남 1녀의 여섯째라는 데서 나왔다”고 얘기한다. 연달아 아들 다섯을 낳은 부모는 내심 딸을 바랐지만 또다시 아들이 나오자 먼저 낳은 형제들만큼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겠지만, 그래도 그는 형들에 비해 존재감이 없었기에 자생력이 생긴 것이라고 얘기한다.

동두천 출신인 그는 어렸을 때 북한의 전파를 타고 들어오는 중국 라디오의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여섯 살 때는 이미 한 번만 듣고도 뜻도 모르는 가사를 외워 불러 부모 형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것이 스케이트였다면 빙상 종목에서 금메달 꿈나무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1980년대 초는 마이클 잭슨을 비롯한 팝스타의 전성기였다. 외국 곡은 가사를 몰라도 따라 부르는데 선수였던 이병철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소풍에서는 그의 원맨쇼가 펼쳐졌다.

학창 시절 어느 학교에나 꼭 한 명씩은 있을 법한 장기 자랑 시간의 터줏대감이었다. 고교 때는 방학을 이용해 미군부대에서 록음악 디제이(DJ)를 맡는 데까지 이어졌다.

대통령도 치료했던 한 치과의사가 제대한 그에게 “시골에 머무르지 말고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서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떠냐”고 얘기한 것이 계기였다. 이병철은 혈혈단신 일본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한국 노래와 일본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2시간을 달려오는 한국 손님들도 있었다. 호응이 좋아지자 아예 ‘천또지(天土地)’라는 밴드를 결성해 거리로 뛰쳐나갔다. 일본에 재즈를 공부하러 온 6명이 뭉친 록그룹(rock group)이었다. 밤무대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야외로 뛰쳐나가 요요기공원, 수족공원 등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그렇게 5년이 지나 멤버들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이병철은 다시 솔로로 나섰다. 이렇게 2000년대를 맞은 그는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이 돈으로 식당 여러 개를 한꺼번에 운영하는 사업가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돈을 들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다 ‘쫄딱 망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말을 아꼈다. 그런데 그 이후가 중요하다. 방송인 조영구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며 그에게 손을 내민 것.

조영구와의 인연은 1992년 연예인으로 구성된 ‘회오리 축구단’에서 시작된다. 조영구는 당시 SBS MC 공채 1기로 갓 입사한 새내기였고 이병철은 일본 식당에서 노래를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마음이 맞았던 두 사람은 이병철이 한국에 올 때마다 조영구와 함께 지내는 사이가 됐다.

조영구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100㎡가 넘는 아파트에서 겨울에는 방 2개에만 난방을 했다. 전기장판은 1인용을 사다 반반씩 걸쳐서 자야 했다. “에어컨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이병철은 회상한다. 지금 조영구는 재테크 서적을 집필할 정도로 성공했다.

2007년 의기투합한 조영구와 이병철은 3인조 혼성 그룹 ‘쓰리쓰리’를 결성한다. 조영구도 ‘전국노래자랑’ 우수상과 각종 가요제에서 입상할 정도로 노래에 재주가 있었다.

당시 ‘그래요’라는 타이틀곡이 뜨면서 쓰리쓰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뜬 것과 비례해 몸은 힘들었다. 특히 여성 멤버가 잠도 자지 못하는 데다 화장도 직접 해야 할 정도여서인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둬 버렸다. 새로 뽑은 여성 멤버들도 연달아 3명이 그만둬 버렸다.

결국 남은 두 명이 공연을 했지만 ‘그림이 너무 안 나온다’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2008년 결혼한 신혼의 조영구가 MC와 가수를 병행하다 보니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하자 조영구 집에서 “애 아빠를 돌려 달라”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이병철은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돈에 미쳤어’ 언더에서 인기 몰이

‘투 가이즈’의 가수로도 활동했던 작곡가 김민진 씨는 영화 ‘복면 달호’에서 차태현이 부른 주제곡 ‘이차선 다리’를 만든 작곡가다. 김민진 또한 빚보증으로 빈털터리가 됐을 때 조영구의 집에서 2년 동안 기거한 바 있다.

‘조영구 하숙생’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새로운 곡을 냈다. 김민진은 하루 만에 ‘돈에 미쳤어’를 만들었다. 단숨에 녹음과 음반을 제작했다. PR 음반 4000장을 내놨다.
‘가명보다 본명이 가슴에 와 닿는대요’
PR 음반이 나온 다음 날 매니저를 자청한 조영구가 한 포장마차에서 강석과 김범룡을 만나는 자리에서 노래를 들려줬다.

강석은 그 자리에서 이병철을 불렀다. 김범룡이 “왜 좋은 이름을 놔두고 이하경(가명)을 쓰느냐”고 물었다.

이병철은 쓰리쓰리로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이하경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강석이 즉석에서 ‘싱글벙글쇼(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목소리로 소개 멘트를 날렸다. “이하경이 노래합니다. 돈에 미쳤서.” “이병철이 노래합니다. 돈에 미쳤서.” 좌중은 이병철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고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이병철은 삼성그룹 창업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1000만 원을 들여 만든 이하경의 앨범은 새로 제작해야 할 판이었다. 이병철이 “삼성이 걸고넘어지면 어떡하느냐”고 묻자 “가명도 아니고 본명인데 뭐가 문제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범룡은 “너의 인생을 1000만 원과 바꾸냐”고 핀잔을 줬다.

데뷔 후 이병철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돈다발을 들고 흔드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름은 한 번만 얘기해도 모두 기억했다.

연말 송년회가 많았던 지난해 12월 이병철은 68번의 행사를 뛰었다. 특히 중년 여성들로부터 호응을 얻기 시작하면서 올 2월에는 본인의 이름을 건 최초의 디너쇼를 열기도 했다.

트로트에서는 한 노래가 언더그라운드에서 오랫동안 묵은 뒤 어느 순간 빛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2001년 발표된 ‘땡벌’은 5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노래였고, ‘무조건’의 박상철은 8년 동안 미용실을 운영하며 가수의 꿈을 키우지 않았던가.

이병철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날을 향해 나가고 있다.

이병철 약력 : 1965년생. 도쿄 커뮤니케이션 아트 전문학교(실용음악 전공). 88년 일본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활동. 93~97년 일본에서 그룹 ‘천또지(天土地)’ 활동. 2005년 한국 활동. 2007년 방송인 조영구와 트로트 그룹 ‘쓰리쓰리’ 활동. 2010년 솔로 1집 발매.

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