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패션 업계 불문율

‘런웨이(패션쇼)에서 쇼윈도(상점)까지 6개월.’ 이는 그동안 패션 업계에서 사실상 고정화된 스케줄이었다.

소비자들이 디자이너가 패션쇼에서 선보인 옷을 구입하려면 적어도 6개월은 꼬박 기다려야 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러한 패션 업계의 ‘불문율’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최근 보도했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이 패션쇼에서 선보인 옷을 곧바로 또는 몇 주 만에 고객들이 입을 수 있도록 상품화하고 있다.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노르마 카말리는 지난 1월 중순 패션쇼를 마친 직후 자신의 인터넷 웹사이트에 새 컬렉션들을 올렸다.

디자이너 신시아 롤리는 자신이 패션쇼에서 선보인 샘플의 디자인을 본뜬 옷을 만들어 패션쇼 직후 판매에 나섰다.

그는 아예 34개의 샘플 가운데 3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트로 각각 4800달러에 내놓기도 했다.

디자이너들이 이러한 ‘파격’을 택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유사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시장에 쏟아지는 것에 대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에게 “이 옷은 내가 디자인한 것’이라는 도장을 찍어둔다는 것이다. 경기 침체로 값비싼 디자이너 의류의 판매가 큰 타격을 입은 탓도 있다.

한정 수량이나마 패션쇼에서 갓 선보인 ‘따끈따끈한’ 옷으로 고객들의 구미를 자극해 지갑을 열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돌파구 모색’인 것이다.

무엇보다 디자이너들은 인터넷 덕분에 백화점 등 전통적인 소매 업체를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소비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월지는 만약에 이러한 ‘즉시 판매’ 실험이 확산될 경우 패션 업계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에 변화가 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지금까지 디자이너가 패션쇼에서 새 컬렉션을 선보이면 이에 대한 ‘수요’를 창출해 내는 것은 보그나 엘르 등 패션 잡지의 몫이었다.

패션쇼에 참석한 에디터나 기자들이 디자이너들이 무대에서 선보인 샘플들에 대한 글을 쓰면 이는 몇 개월 뒤 가판대나 서점에 깔리는 잡지들에 실려 패셔니스타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그 사이 소매 업체 바이어들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만한 스타일을 고르고 디자이너들은 선택된 디자인으로 제품을 만들어냈다.

6개월 기다려야 했던 것은 옛말

컨설팅 회사 베인&코에 따르면 지난해 디자이너 의류의 글로벌 판매는 11% 급감했다. 여기엔 6개월이란 ‘시차’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디자이너들은 소위 ‘패스트 패션(fast-fashion)’ 소매 업체로 불리는 ‘H&M’이나 ‘자라’ 등의 의류 체인점들이 유사한 스타일의 옷을 신속히 상품화해 저가에 판매하는 것이 디자이너 의류의 판매 급감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물론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신상품을 판매하는 ‘즉시 판매’에는 리스크가 있다.

우선 디자이너들이 일부 신상품을 직접 판매하고 이보다 늦게 의류 소매 업체에 같은 디자인의 제품을 공급한다면 소매 업체들이 불만을 나타낼 수 있다.

디자이너 다이안 본 퍼스텐버그는 “패션쇼는 기본적으로 소매 업체 바이어들을 위한 것”이라며 당장은 ‘즉시 판매’를 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일부 소매 업체들은 디자이너들이 패션쇼에서 선보이는 옷의 상당수는 일반인들이 소화하기 힘든 디자인이 많아 ‘즉시 판매’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캐롤라이나 헤레나가독특하게 디자인한 무도회 드레스나 번쩍이는 비즈가 달린 스포츠웨어 등을 패션쇼가 끝난 후 곧바로 구매하는 소비자를 찾긴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종 한계에도 불구하고 런어웨이와 쇼윈도의 거리를 가깝게 하려는 시도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는 버버리다. 버버리는 지난해 9월 런던 패션쇼가 끝난 후 48시간 만에 자사 웹사이트에 각각 3000달러와 4000달러짜리 2벌의 트렌치코트를 올려 판매에 나섰다.

버버리는 수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유럽과 미국에 거주하는 80만 명에게 패션쇼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고 일부는 ‘선주문(pre-order)’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e메일 등을 통해 미리 알렸다.

또한 인터넷 패션쇼 관람객들이 어느 디자인이 가장 인기가 있을지 의견을 남기도록 ‘초대’했다.

프랑스의 디자이너 롤란드 뮤레(Roland Mouret)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패션쇼 전에 소매 업체들에 자신의 RM 라인을 선판매해 패션쇼 후 한 달 만에 매장에 자신의 옷이 내걸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는 “고객들은 6개월씩 기다리려고 하지 않고 나 역시 ‘복제품’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박성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