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릴 적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고, 아버지는 여학교 국어 선생님이셨다. 그 시절은 6·25전쟁을 치르고 모두가 살기가 어려운 때였다. 엄마는 학교로 출근해야 했고 오빠는 엄마를 따라갔다. 취학 전이었던 나는 왕십리 무학여고 국어 교사인 아버지께 주어진 사택에 혼자 남겨졌다. 엄마가 간식과 장난감, 동화책을 머리 곁에 두고 나가고 아버지는 쉬는 시간에 잠시 나를 돌보기 위해 사택에 몇 번씩 들어오셨다고 한다.나는 혼자 놀다가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놀란 토끼처럼 뛰어나와 울면서 하는 말. “아빠는 돈도 못 벌구 왜 매일매일 학교만 가냐”고. 아버지는 그렇게 매달려 자기와 놀아 달라는 딸을 달래고 또 수업을 하기 위해 우는 나를 두고 나가셨단다. 그리고 저녁에는 엄마와 다투셨단다. “당장 사표를 내고 영희랑 집에서 살림만 하라”고. 엄마는 어이없는 마음으로 많이 힘드셨다고 한다. “당신이 제대로 월급을 가져다주면 그러죠.” 고3 담임을 맡으신 아버지는 그 시절 등록금을 내지 못해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된 학생들이 안타까워 수업료를 대신 내주고 월급 대신 헌 책방에서 보고 싶은 철학책 몇 권을 안고 들어오셨단다. 아마 그 당시 우리 집 풍경이었나 보다.그렇게 지내다 내 나이 사춘기 소녀인 중3.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한 달 만에 장맛비가 서럽게 마구 마구 쏟아지던 날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운명 같은 일을 치르고 2남 2녀의 우리를 데리고 서울로 다시 올라와 100일간 술만 드셨다. 아버지는 부산의 여자대학 교수 자리를 등진 후였다. 어느 날 정신을 치리시고 교육감인 아버지 선배에게 부탁해 ‘효자동 국립 맹아학교’의 국어 교사로 발령을 받으셨다. 그때 나는 여고 1학년.아버지가 어느 가을날 학교가 끝나거든 무얼 받아서 집으로 갖고 가라는 심부름 때문에 맹아학교 효자동을 향해 걸었다.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자 키가 크신 아버지가 엎드려 무언가를 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난 먼 언저리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몇 장의 은행잎을 주워서 교실로 향하는 모습. 난 조심스럽게 뒤따라가 창밖에서 아버지의 수업 풍경을 볼 수 있었다. 6~7명의 학생들은 나이도 다 달라 보였다. 학생들 책상 앞에 2~3장씩 은행잎을 놓아 주시는 아버지.“자, 어디 책상 앞에 놓아 있는 것들을 만져 보아라.” 학생들은 손을 더듬거리며 만져 본다.“그래. 지난봄에는 잎이 매끄럽고 물기를 먹은 은행잎이었지. 어느 새 긴 여름을 지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어. 지금 잎은 어떠니? 메마르고 물기도 없는 잎이지.”나뭇잎만 만져 보고도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시는 수업 풍경. 시인다운 아버지의 수업 모습이었다. 웬 여학생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다. 아마 사고로 실명이 된 소녀였나 보다. 아버지는 그 여학생의 어깨를 똑딱 거리며 “시간은 흘러가는 거야”라고 전했다.시인 아버지의 점자책이 아닌 수업 풍경을 다시 눈앞에 그려본다. 사춘기의 나는 그날 그 수업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잔잔한 가슴을 가지신 아버지도 몇 년 후 직장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항암 치료를 받았다. 그때 맹아학교 제자들이 병실에 와 돌아가며 지압이며 안마며 해주며 병실을 지켜주고 있었다.의사의 말씀은 6개월 정도 사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후 10년을 더 사셨다. 맹아학교 제자들의 주례사를 단골로 하시면서. 늘 행복하신 마음으로. 지금은 우리 고향 선산에 아버지가 좋아 하시는 소나무 숲 울창한 곳에서 오늘도 흘러가는 구름 한 점을 보시면서 시 한 수 읊고 계시겠지. 늘 두 딸에게 여자가 글을 쓰면 마음이 사랑스러워진다고 하셨는데. 그런 두 딸은 시인이고. 동화 작가가 되었다. 막내 여동생 정희가 아버지를 떠나보내시고 쓴 시가 떠오른다.‘아버지 거기는 어떠신지요. 아버지 딸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아버지 딸이어서 세상에 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딸이어서 세상이 밝았고 즐거웠습니다’.1957년생. ‘가림T&D’와 ‘하트뷰’의 대표이면서 다원디자인문화원의 원장이다. 1982년 동화 ‘그녀석과의 추억 구름이 나를 불러’로 데뷔해 동화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