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려웠던 시절 나를 위해 삶의 끈을 놓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너무나 고맙다. 그리고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내 아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작년 여름 정말 몇 년 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물론 나 혼자는 부모님 생각이 날 때마다 다녀오곤 했었지만….내 고향은 전북 완주군 삼례읍 석전리 학동마을이다. 동네 좌우측으로 100년 된 소나무들이 즐비했고, 그 옛날 그 소나무들 위에 아름다운 학(鶴)들이 앉아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갑자기 중학교 3학년이던 누이가 복막염으로, 2년 후에 딸을 잃은 슬픔과 삶의 기력을 잃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또다시 1년 후 할머니가 작고하시어 행복하고 단란하던 시골 농촌 마을의 우리 집 분위기는 완전 초겨울 집으로 변해 있었다.연이은 줄초상에 아버지는 그래도 나 때문에 삶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하지만 내가 ROTC 장교로 전역한 후 4년 후(1997년)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아 어머니 곁으로 가셨고 두 분을 조그만 선산에 합장묘로 모셨다.나는 성격과 행동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가 46세 때 막둥이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크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다. 사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김매기 등 부모님 일하시는데 항상 옆에서 도와드리면서도 전교 등수 안에 들었기 때문에 부모님 속 썩일 일도 없었던 것 같다.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직접 밥을 하고 국을 끓여 할머니와 아버지 식사를 1년 동안 해드렸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큰 언덕’이라기보다 ‘남자는 여자가 없으면 이렇게 약한 존재구나’라는 현실을 알려준 존재였다고나 할까. 분명 불쌍하고 측은해 보였던 것이다. 그 후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과 1년 재수 생활 때까지 여러 번의 인생 갈림길에서 갈등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불쌍하신 아버지 생각에 나쁜 길로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젠가 부모님 묘소에 들러 두 분께 이런 이야기를 해드렸다.“그래도 어머니, 내가 이렇게 바른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부지 덕이니 두 분 하늘에서 나 때문에 싸우지 마소.”인류의 역사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자식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갈파한 어느 역사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들은 극성 아빠들이 거의 없이 엄마의 손에 자식을 맡겨 놓아 잘못된 자식을 되돌리기 힘들게 만든다. 극성 아빠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본받아야 할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난 극성 아빠는 아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스킨십만큼은 잘해준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스킨십 몫까지 해 줄 생각이다. 만약 아버지가 지금 살아 계신다면 나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 평생 노력했을까. 그래도 우리는 서양인과는 분명 다르다. 한국인에게 아버지는 거역할 수 없고 자식은 결국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올해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산소에 자주 다녀오려고 한다. 작년 12월 갑자기 독성에 의한 급성 A형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으면서 생각나는 분이 그래도 부모님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아버지였다. 만약 내가 지금 우리 아이들을 두고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잠시 생각해 보니 그 어려웠던 시절 나를 위해 삶의 끈을 놓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너무나 고맙다. 그리고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내 아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올해는 아버지에 대해 주위 사람이나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 나누려고 한다. 이젠 내가 자식을 둔 아버지가 되었으니 어머니와는 분명 다른 존재인 아버지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또 내가 위치한 가족 내 아버지의 자리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많은 분들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련다. 오늘 내 인생에는 부모님 말고 그리운 사람이 없다. 그중에서도 추운 겨울에 그리운 사람은 아버지다.거성통상과 믹스막스코리아 대표이사를 거쳤다. 현재 한국문화상품연구소 소장으로 SERI 내 포럼인 유통경제포럼과 녹색성장실천연구회 포럼 운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