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온난화 시대의 신비즈니스 키워드

“공포심은 신념보다 더 강하다.”며칠 전 영화 ‘셜록 홈즈’를 보다 이런 대사에 눈길이 멎었다. 순간 이 간략한 두 문장에 세상의 또 다른 법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포심의 위력이다. 공포심 앞에는 그 어떤 강고한 신념이나 의지마저 허물어뜨리는 마력을 지닌다. 이 영화에서 명탐정 셜록 홈즈와 대결하는 블랙우드는 마법을 구사하는 컬트 조직의 두목인데 살인 혐의로 사형을 당했지만 다시 살아난다.물론 그의 부활은 마법도 아니고 주술에 의한 것도 아니다. 미리 계획된 각본대로 연출한 것이다. 블랙우드는 비밀 조직을 장악하고 장관과 국회의원마저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블랙우드에게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매직은 다름 아닌 공포심이었다. 즉, “공포심은 신념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그 공포심으로 세상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 공포심 앞에 자신의 정치적 신념마저 포기하고 악의 편에 서려고 한다. 누구나 공포 앞에서는 ‘자기보존’의 욕구가 발동하고 살아남기 위해 신념마저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블랙우드는 공포심을 이용해 세상을 장악하려고 하지만 명탐정 셜록 홈즈에 의해 기만술이 탄로 나고 템스 강변에서 최후를 맞는다.영화 ‘셜록 홈즈’는 공포심이 얼마나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지를 깨닫게 한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 경제 위기 시대일수록 마치 불발탄처럼 사회와 사람들 속에 잠재돼 있는 게 불안과 위기의식, 그리고 공포심이라고 할 수 있다.주식시장 격언 중에 ‘공포를 사라’는 말이 있다. ‘탐욕을 팔고 공포를 사라’고 한다. 탐욕에 취하면 돈을 잃게 되고 공포를 사면 돈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투자 원칙을 실행해 지난 한 해 투자자 중에서 가장 많이 돈을 번 사람이 있다. 미국의 헤지 펀드사인 아팔루사의 데이비드 테퍼 회장은 지난 한 해 25억 달러 이상을 벌었다. 당시 그가 씨티그룹 주식을 매입한 가격은 주당 79센트,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주식은 3달러72센트에 불과했다. 최근 씨티그룹의 주가가 3달러대로 뛰고, BOA가 주당 15달러대에서 거래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투자 수익률이 400%나 되는 셈이다. 테퍼 회장은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어 흥정할 필요도 없었다. 나만 혼자 사는 것 같았다”고 당시 상황에 대해 말했다. 누구나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기란 두려운 법이다.영화 ‘해운대’에 이어 외화 ‘2012’가 흥행 돌풍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영화들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가 해운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영화 ‘해운대’가 만약 1970~80년대에 선보였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온난화에 따른 지구적 재앙에 대한 체감도가 거의 없어 아마도 흥행에 ‘참패’하지 않았을까.오늘날에는 영상 미디어가 여론과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을 주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해운대’는 바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구적 재난과 사람들의 자기보존 욕구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예상보다 더 흥행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재난에 대한 공포심이 증폭될수록 영상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살아있음’을 느끼고 안도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지구적인 재난이 발생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재난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그 이유는 뜻밖에도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나오는 ‘숭고미’ 개념으로 풀이할 수 있다. 때로는 철학자가 제시한 하나의 개념이 복잡한 현상들을 깔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게 바로 숭고미다.“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화산, 황폐만을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격한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그리고 광포하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와 같은 것들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저항 능력이 이런 것들의 힘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나약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그만큼 더 매력적인 것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대상들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런 대상들은 정신력을 고양시켜 주며, 자연의 엄청난 위력에 우리 자신을 견주어 볼 수 있는 용기를 마련해 주는 저항능력을 발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숭고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돈 드릴로의 소설 ‘화이트 노이즈’에 나오는 다음의 장면을 통해서도 숭고미를 이해할 수 있다.“금요일인 그날 관습과 규칙에 따라 우리는 중국 음식을 사가지고 와서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다. 홍수·지진·산사태·화산 분출 장면들이 방영되었다. 남편이 자기 아내와 말다툼하는 시트콤을 보다가 울음을 터뜨릴 뻔했던 스테피도 재난과 죽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장면들에 완전히 몰입된 것 같았다. … 그 일 말고는 우리는 조용히 집들이 바다 속으로 쓸려 들어가고 밀려드는 용암 덩어리에 마을 전체가 뿌지직 부서져 불타는 장면들을 계속 시청했다. 재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더 크고 더 장엄하고 더 압도적인 것을 원했다.”이 소설에서 글래드니 가족이 TV의 재난 보도를 보는 것은 단지 재난 보도의 스릴 넘치는 스펙터클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주는 가공할 위력 앞에서 살아있음에 대한 안도감을 ‘소비’하는 것이다. 그 소비는 인간의 죽음 본능 앞에서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위로’인 셈이다. 지구적 재난으로 인해 돌발적인 죽음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한 가족들은 새삼 위안을 얻고 살아갈 용기를 다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스펙터클한 TV의 재난 보도는 ‘삶 본능’을 고양시켜 주는 긍정적 작용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TV가 재난 보도를 하는 방식이다. 시청자들이 재난 보도 자체를 스펙터클화하지 않으면 외면하기 때문에 갈수록 참혹할 정도로 스펙터클한 경향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2012’에서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대지진의 영상은 ‘메가 스펙터클’의 진수를 보여준다.그런데 칸트는 우리가 자연의 재난을 숭고하다고 판정하려면 그것은 ‘공포’와 ‘안전’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우리가 저항하려고 노력하는 대상(재난)은 악이고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아는 경우라면 그 재난은 공포의 대상이 되면서 불쾌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런데 안전한 곳에 있다면 또 다른 감정을 맛보게 된다. 재난의 현장에 있는 게 아니라 안방이나 영화관에서 그 재난의 광경을 보게 되면 대자연의 광포한 위력 앞에서 ‘자기보존’의 욕구를 느끼게 되고 불쾌(공포)한 감정이 쾌감(안전)으로 전환되면서 감정이 고양되는 것이다.지구의 위기를 나타내는 환경 시계는 오후 9시 33분이라고 한다. 인류를 멸망에 빠뜨릴 재앙의 시간은 2시간 27분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는 이미 물에 잠기고 있다. 지구적인 위기로 인한 위기감은 공포심을 낳고 있다. 누구든지 쓰나미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대지진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설 수 있다. 누구나 끔찍한 테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만은 그 재난의 현장에 있지 않기를,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영화 ‘해운대’와 ‘2012’와 같은 재난영화는 바로 지구적 재난으로 야기되는 공포심과 그로 인해 유발되는 불쾌감을 ‘소비’하게 함으로써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투자자는 공포를 사고, 영화감독은 공포를 팔아라. 위기의식과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지구온난화 시대에 ‘공포심’이 새로운 비즈니스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적인 재난이 급박하게 전개되면 될수록 ‘재난 비즈니스’가 더욱 호황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 단, 재난 비즈니스가 성공하려면 ‘공포를 팔되 자기보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고 칸트는 주문한다.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