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는 나라 빚 고민

2002년 딕 체니 미 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전략을 세우면서 당시 재무장관인 폴 오닐에게 이렇게 말한다. “재정 적자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deficits don’t matter)”. 돈 걱정일랑 하지 말고 제대로 된 전쟁 전략이나 짜는 데 주력하자는 얘기다. 오닐은 이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는 몇 개월 안 돼 교체된다. 오닐은 나중에 미 의회에서 이 같은 발언을 공개했고 체니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한 말(in the political context)”이라고 해명했다. 미국 뉴욕시 맨해튼 타임 스퀘어에는 ‘부채 시계(US debt clock)’가 걸려 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이 시계는 미국이 얼마의 부채를 지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이 시계는 1989년 처음 등장한 후 두 번이나 교체됐다. 부채 규모가 늘어나면서 숫자를 표기할 자리가 부족해 새 장치로 바꿨다. 2009년 12월 30일 현재 여기에 걸려 있는 수치는 무려 14자리 숫자다. 약 12조1546억 달러. 달러당 1170원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 돈으로 약 1경4220조8820억 원에 달한다.미국이 1년여 만에 최악의 경제 위기 상황을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크리스마스에 쇼핑몰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너도나도 연말 휴가를 떠나면서 주택가들은 한산한 분위기다.미국은 이제 경제 분야에 관한 한 한시름 놓은 것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미 언론들은 2010년 새해 미국 경제의 가장 큰 짐으로 두 가지를 뽑고 있다. 바로 ‘고용(employment)’과 ‘부채(debt)’ 문제다.두 가지 문제는 한 고리로 연결돼 있다. 고용 시장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고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 정부는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용도 곧 돈(부채)의 문제로 귀결되는 셈이다. = 부채 문제는 7년 전 딕 체니 부통령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미국인들에게 큰 골칫거리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때도 매년 여기저기 쓰는 돈이 많아 재정 적자(fiscal deficit)가 컸고 밖으로 내다파는 것보다 들여와 쓰는 게 많아 경상수지도 항상 마이너스(current account deficit)였다. 이른바 미국의 고질병인 ‘쌍둥이 적자(twin deficit)’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그러나 그때는 상황이 달랐다. 얼마든지 ‘빚(debt)’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국채를 발행하면 일본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각국의 투자자들은 미 주식 시장을 향해 엄청난 규모의 달러를 투입했다. 미 정부는 빚이 아무리 많아도 국채 발행을 통해 계속 빚을 리볼빙(revolving: 쉽게 말해 돌려막기)할 수 있었고 해외에서 자동차와 TV 등을 사오면서 지불했던 달러들은 다시 주식 투자 형태로 미국으로 환류되는 메커니즘이 있었다. 체니가 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던 이유다.문제는 이런 메커니즘이 유지 가능(sustainable)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우선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부채 규모가 너무 커졌다. 미국은 매년 1000억 달러 이상 들어가는 막대한 전쟁 비용 외에도 지난해엔 월가를 살리기 위한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에 1690억 달러, 중소기업과 영세사업자를 지원하기 위한 경기부양안(ARRA)에 1250억 달러, 국책 모기지 업체인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 맥(Freddie Mac)에 830억 달러 등을 썼다. 이 덕분에 미국의 재정 적자는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해 9월로 끝난 2009 회계연도 재정 적자는 1조4170억 달러였다. 적자 규모는 기록을 냈던 1년 전보다 9620억 달러 더 늘었다. = 백악관 예산관리처(OMB)와 국회 예산처(CBO)는 2010년에도 1조5000억 달러의 적자가 발생하는 것을 포함해 2019년까지 총 9조 달러의 적자가 더 날 것으로 예상했다. 10년 후면 부채 규모가 20조 달러가 넘는다는 얘기다.이게 얼마나 되는 빚일까.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디피트더데빗(defeatthedebt)에 따르면 미국의 빚은 앞으로 10년 동안 초당 2만8700달러(3358만 원)씩, 분당 172만 달러(20억 원)씩, 하루 25억 달러(2조9000억 원)의 속도로 늘어나게 된다. 미국은 이런 빚의 이자를 갚는 데만(원금 상환은 제외) 올해 1170억 달러의 예산을 책정해 놓고 있다.재정 적자뿐만 아니다. 최근 약(弱)달러 덕분에 상황이 약간 호전되긴 했지만 매년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수지 적자 문제도 미국의 빚 고민에 고민을 더하고 있다. 2009년 12월 21일 NYT는 재정 적자와 부채가 줄어들지 않으면 해외 투자자들의 미국 국채 투자 기피 현상과 인플레이션 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국으로의 달러화 환류 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다는 얘기다.두 번째는 채권국들의 ‘도전(?)’이다. 미국의 부채가 너무 많아지자 달러화가 계속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최대 채권국인 중국(지난해 말 현재 총 7764억 달러의 미 국채 보유)은 경제 위기 과정에서 대놓고 기축통화를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미 정부도 이 같은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최근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폭증하는 정부 부채를 억제하기 위한 긴급조치가 없으면 미국 경제는 더블 딥 불황에 들어설 수도 있다”고 말했다.미 정부가 생각할 수 있는 조치는 제한적이다. 우선 증세 방안이다. 미국은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쓸 데는 많은 데 들어오는 돈은 적은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미국의 조세 부담률은 부시 전 행정부의 대대적 감세 정책으로 사상 최저 수준이다. 특히 고소득층에 대한 세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 오바마 정부는 최고 소득세율을 부시 이전 수준인 39.6%(현재 35%)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민주당은 2010년에 기한이 돌아오는 각종 세 감면 조항을 일제히 정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그러나 공화당을 비롯해 국민들의 광범위한 납세 거부 정서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오바마는 이 때문에 당장은 재정지출 축소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보험 개혁과의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건강보험 개혁과 관련, 피터 오재그 백악관 예산국장은 “건강보험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40년 후면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등 두 가지 건강보험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예산만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그 상황이 되면 나라 살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보험을 개혁하더라도 당장 10년간은 건강보험 대상자를 확대하는데 1조 달러를 더 써야 한다. 공화당과 반대파는 ‘의료 지출을 줄인다면서 지출을 더 늘리는 모순된 정책을 쓰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세 번째는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한 조치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무역 적자를 줄이면 세입이 늘고 경제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무역상대국에 통화 평가절상 등 환율 조정을 요구하고 보호무역 장벽 철폐 등의 공세적인 무역 정책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그러나 이 같은 방안 또한 글로벌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교역 활성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해 온 오바마로서는 선택하기 힘든 카드다. 이 때문에 그는 경기 부양 예산 집행 시 공공 공사 발주와 조달에서 미국 업체와 미국산 제품을 우대하는 ‘바이 아메리카’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때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간접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블룸버그통신의 칼럼니스트인 마이클 시버는 “오바마의 참모들은 부채를 줄이기 위한 어떤 방안도 쉽지 않으며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오바마의 인기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우선 올해 총선에 승리해 재선의 가도를 닦는 전략을 짜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박수진 한국경제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