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한국의 금융·자본시장은 지난 10여 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매우 바쁘게 달려왔다. 다들 알듯이, 한국은 1992년 주식시장을 개방하며 자본시장 자유화를 본격화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으며, 2003년에는 신용카드 위기, 그리고 2008년 하반기에는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도산과 함께 글로벌 금융 위기에 직면했다. 어려움이 많았고 그때마다 5000년 질곡의 역사 속에 강하게 각인된 위기 극복 DNA의 힘으로 슬기롭게 극복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1960~70년대 한국 정부가 추진했던 제조업 육성 정책을 바탕으로 현재의 제조업 강국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금융 산업 또한 미국 유럽 홍콩 등의 자본시장을 따라갈 수 있는 저력이 있다고 믿는다.지난 2월 큰 기대 속에 한국의 자본시장법이 시행됐다. 한국 제조업체들과 마찬가지로 국내 금융회사를 양적·질적으로 육성,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내수 위주의 한국 금융시장을 동북아 지역의 금융 허브로 발돋움하도록 친시장적인 법적 근거를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 그 취지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작년 글로벌 금융 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로운 통합법의 출현으로 인수·합병(M&A)을 통한 거대 증권회사의 출현, 다양한 금융 기법 및 자산을 활용한 금융 상품의 출시 등 금융시장의 긍정적 변화와 혁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었다.그러나 최근 들어 새로운 제도의 희망적인 취지가 많이 퇴색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즉, 새로운 형태의 사업에 대한 관계 당국의 영업 인가는 생각보다 제자리걸음이고 신종 상장지수펀드(ETF)를 포함한 새로운 주식, 파생 연계 상품 등의 출시 또한 세제를 비롯한 여러 제도의 미비, 수요자들의 이해 부족, 고위험 상품에 대한 시장의 우려 등으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글로벌 금융 위기 전, 그러니까 불과 1~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립식 펀드 투자, 해외 펀드 투자 등이 활발해지며 국내에 새로운 투자 문화가 정착돼 가고 있다는 기사들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의 불안한 터널의 끝을 지나가는 지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제도를 주장하던 금융 혁신 세력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반면 많은 시장 참여자들은 새로운 개념의 시도를 통해 시장을 주도하기보다, 이에 수반되는 ‘계산된 위험 (calculated risks)’을 피하는데 급급하고 기존의 틀에 안주하려고 한다. 고위험 상품은 법적 위험이 따르며 새로운 개념의 상품은 고객에게 설명하기가 어렵고 내부 판매 직원을 자체 교육하기에도 상당한 돈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하지만 한국 정부와 시장 참가자들이 한국의 금융시장이 세계의 선진 대열에 동참하기를 진정 꿈꾼다면 위험이 따르더라도 다양한 노력과 시도를 계속해야 하고 멈출 수 없는 것이 당위라고 본다. 특히 아시아 지역인 중국, 인도 시장 등에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미래 세대를 위해 좀 더 나은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려면 더욱 그러하리라고 본다. 물론 리스크는 중요하고 모든 시장 참가자는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취하게 될 이익의 규모와의 상관관계에서 잘 관리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비용과 위험이 있더라도 새로운 상품과 투자 기법을 투자자들에게 소개해야 한다.위기는 기회를 낳는다. 한국의 제조업이 일구어 낸 한강의 기적과 같이 이 국제금융 위기에 따라올 기회를 활용해 ‘여의도의 기적’을 탄생시키기를 바란다. 현재의 시장 상황이 불확실하다고 움츠리기보다 전향적으로 시장 상황에 맞게 규정을 정비하고, 새로운 상품을 연구하고, 시장에 소개하고, 투자자들의 이해를 도모하며 투자할 수 있게 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약력: 1960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고려대 MBA 수료. 87년 바클레이즈은행 서울 지점 근무. 91년 플릿 내셔널 은행수석 RM(Relationship Manager). 2000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한국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