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변신하는 지하 상권

서울의 주요 지하 상권의 효시는 서울 시청광장 지하쇼핑센터다. 반공 의식이 강조되던 1960년대부터 만약의 전쟁 발발에 대비한 지하대피소의 개념에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주요 지하철역과 연계된 지하도를 건설하고 이를 상가로 개발, 일반인들에게 분양하면서 형성됐다. 1970년대에 30개, 1980년대에 28개, 1990년대에 5개가 준공돼 현재 서울의 29개, 전국 72개의 지하상가가 조성돼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시 지하상가에 처음 입점했던 토박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황무지 같은 곳에서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그러던 것이 1980~90년대 경기 호황을 맞으며 번성, 백화점이나 재래시장 사이의 틈새를 파고들며 지하상가에 촘촘히 들어선 점포들은 중저가 상품 위주로 전성기를 누렸다. 지하도상가가 활성화되던 1970~80년대에는 주로 강북 위주로 을지로입구, 명동, 회현, 동대문야구장 앞, 소공동 지하상가가 번영을 이뤘다. 이후 1990년대부터 경제 중심이 강북에서 서서히 강남으로 넘어가면서 강남역, 강남터미널, 영등포역, 잠실역의 지하상가가 활기를 띠었다. 강남지역의 지하상가는 강북의 남대문, 동대문시장의 도·소매 기능을 강남으로 가져오며 성장세를 이어갔다.지난해 중기청이 발표한 ‘전국 지하상가 경쟁력 현황’ 자료를 살펴보면 시설관리공단이 35개(48.6%), 자치 관리가 18개(25%), 개발 회사가 12개(16.7%), 민간 법인이 7개(9.7%)의 지하상가를 관리하고 있다. 초기에 지하상가에 입주한 상인들은 시설관리공단에 3000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들어갔지만 지하상가가 번성함에 따라 권리금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강남역 지하상가의 경우 16~19㎡(5~6평) 자리에 4억~5억 원의 거래가가 형성되기도 했다.하지만 이러한 지하상가의 성장세도 대형 마트와 백화점, 쇼핑몰의 개발로 인해 성장이 멈췄다. 시설 노후와 대형 상가의 도전으로 지하도상가의 고객을 빼앗기게 됐다. 대부분의 지하도상가가 지하철 역세권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형 백화점, 쇼핑몰도 역사를 중심으로 개발되자 자연스레 매출 감소를 겪게 됐다. 더구나 자동차 생활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주차장이 없는 지하상가는 한계에 부딪치게 됐다.지하상가의 대체 개념으로 탄생한 것이 현대화된 지하 쇼핑몰인 삼성동 코엑스다. 하지만 코엑스는 이제까지의 지하상가에서 소규모 상인들의 공간이 아니라 브랜드숍들의 집합소로 그 성격을 달리했다. 그리고 강남고속터미널에 조성된 센트럴시티도 강남터미널 지하상가와 연결됐지만 경계선을 넘어서자마자 전혀 다른 쇼핑 공간으로 변모한다. 지하 쇼핑몰과 지하도상가의 차별성은 브랜드숍의 입점뿐만 아니라 쾌적한 휴식 공간, 극장 서점 푸드 코드 등의 여가 시설, 다수의 주차장 등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강남의 강남역, 강남터미널, 잠실, 영등포 지하도상가는 현재까지 그 기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강북의 지하도상가들은 예전만 못하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하도상가는 번영회 차원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2007년 8월에는 최초로 전국 지하도상점가 활성화를 위해 전국 지하도상가번영회 대표와 중소기업청 시장지원팀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국 지하도상점가연합회는 우선 실태 조사부터 시작해 현대화 사업 등을 위한 구상과 건의 사항이 제시됐다.그러나 지하도상가의 활로는 입종별로 특화된 도·소매 유통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상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강남터미널 지하도상가의 경우 꽃과 인테리어 용품이 특화돼 시즌별로 어버이날 시기에는 꽃을 찾는 고객과 겨울이면 크리스마스트리를 찾는 고객이 붐빈다.그리고 강남역은 중저가 패션, 동대문은 운동 용품과 스포츠 의류, 회현은 카메라 등 전문 기기, 소공동은 골동품, 명동은 외국인 대상 상가로 특화됐다.이렇게 특화된 도·소매가 있는 지하도상가의 경우 타 지하도상가에 비해 상황이 좀 나은 편이다. 강남터미널 지하도상가의 한 화원에서 일하는 시정애 씨는 “최근 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매출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꽃이나 인테리어 용품을 찾는 손님은 아직 많다”고 말한다. 그리고 “최근 9호선이 개통돼 고속터미널역 지하상가를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늘었다”고 덧붙였다.지난해부터 지하도상가에는 빨간색의 자극적인 문구가 실린 플래카드가 내걸리기 시작했다. 내용은 서울시의 상가 공개 입찰 원칙을 철회하라는 것이다. 서울시와 서울시설관리공단이 기존 수의계약이었던 지하상가 점포의 임차인 선정 방식을 경쟁입찰로 바꾸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2008년 4월부터 서울 25개 상가 2500여 점포를 대상으로 우선 계약 기간이 같은 해 5월 31자로 만료되는 강남역 지하도상가 35개 점포를 시작으로 계약 방법을 일괄 경쟁입찰로 바꾸기로 했다. 이러한 서울시의 방침에 따라 기존 상가 운영자들은 이를 재산권은 물론 생존권을 위협하는 처사로 받아들이고 단체 행동에 나섰다.강남터미널 지하도상가 3구역 번영회의 나정용 총무는 “수억 원의 권리금을 내고 들어온 점포에 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원래의 보증금 3000만 원만 받고 나가라니 부당한 처사”라고 말했다.최근 강남역 지하도상가는 논쟁 끝에 경쟁입찰에서 지하도상가변영회가 낙찰 받아 생존권은 수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낙찰 조건에 시행업자는 169억 원의 개·보수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강남역의 212개 점포가 이 비용을 감당할 경우 각 점포는 약 8000만 원씩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소규모 상인들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영세 상인들이 감당해 내기 힘든 조항들이 많아 낙찰 이후에도 이를 풀어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그리고 이제 논쟁은 강남터미널 지하도상가로 옮겨왔다. 현재 서울 내 가장 큰 지하상가인 강남터미널 지하도상가에는 3개 구역 모두 합해 650개 점포가 영업하고 있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만료된 점포에 대해 공단 측으로부터 무단 점유를 이유로 명도 소송을 당한 상태다.지하도상가는 현재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수십만 명의 유동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이상 알뜰한 쇼핑족들에게는 여전히 인기가 높다. 특히 개·보수를 통해 현대화 작업이 어느 정도 가시화될 경우에는 여느 지상 쇼핑몰 부럽지 않은 입지 환경이다. 일례로 최근 대구시의 반월당 지하상가인 메트로센터가 보다 쾌적한 환경으로 변모해 성장 여부와 파급효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하철 1, 2호선이 교차해 하루 20만 명이 넘는 유동인구를 확보하고 있는 반월당 지하상가는 서울의 코엑스에 버금가는 지하 쇼핑몰을 겨냥하고 있다.주목할 점은 넓은 주차장을 갖추고 출입구마다 에스컬레이터, 쾌적한 냉난방 시설 등을 갖춰 ‘지하’라는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 초고속 통신망, 공연을 위한 중앙광장, 멀티비전이 설치된 이벤트 광장 등으로 문화, 휴식 공간으로 거듭났다.앞으로 지하상가는 한동안 업그레이드를 위한 변화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상인들 자체가 지하도상점가 활성화를 위해 제도적·시설적 개혁을 도모하고 있다. 각 지하상가별 특성화 전략과 함께 리모델링에 성공해 나간다면 일반인들의 쾌적한 쇼핑 공간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이진원 기자 zinone@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