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기 패션 연출법
요즘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날이다. 아침저녁으로는 꽤 선선해졌지만 여전히 한낮에는 섭씨 영상 3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특히 저녁에 미팅이라도 있는 날이면 필자는 옷장 앞에서 평소보다 몇 분을 더 멍하니 서 있곤 한다.한여름의 낮과 초가을의 저녁을 커버하는 센스 있는 옷차림을 연출하기 위해 평소 패션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본인조차 반소매 옷을 입어야 할지, 긴소매 옷을 입어야 할지 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고민하는데, 평범한 비즈니스맨들이야 여부가 있겠는가. 덥지만, 계절을 앞서 사소한 가을 아이템을 매치하는 일은 다가올 남성의 계절인 가을과 가을 남성으로서의 패션에 대한 예의다.패션계의 디자이너들은 늘 한두 시즌을 앞서 컬렉션을 준비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스타일(Style)’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패션 잡지 기자들도 다음 시즌 동향에 늘 안테나를 곤두세우며 다음 달에 나올 잡지를 위해 한 달 한 달을 재빠르게 앞서 살아가고 있다. 아마 이들의 이런 노력 덕분에 진정한 멋쟁이는 계절을 앞서 나간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늦더위의 때 아닌 심술로 한강의 수영장들도 8월 30일까지 연장 영업을 한다지만 이미 백화점과 패션의 거리인 압구정, 명동 일대에는 보기만 해도 더운 가을 아이템들이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실용성은 기본이요, 패셔너블함은 보너스인 간절기 단품 아이템을 미리 준비함으로써 가을 멋쟁이로 센스를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기로 하자.‘대표적 간절기 아이템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개의 경우 ‘카디건’을 꼽곤 한다. 여기저기 척하니 걸쳐도 멋스럽고 어쩌다 좋은 품질의 캐시미어 카디건을 구입하기라도 한다면 이는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스테디하게 이용하게 될 효자 아이템임이 분명하긴 하다. 그러나 카디건이 주는 이미지는 대부분 캐주얼한 느낌보다는 댄디한 느낌이 강하며 활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남성의 이미지에 가깝다. 무엇보다 배가 나온 남성들에게는 자칫 치명적인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본인의 나이보다 살짝 더 들어 보이게 만들기도 하는 카디건은 솔직히 말해 패션을 아주 잘 이해하는 남성들에게는 멋스러운 ‘득템(아이템을 획득한다는 인터넷 속어)’이겠지만 패션에 조금 훈련이 덜 된 초보자들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다소 난이도가 높은 패션 아이템이다.그래서 요즘은 ‘플리스’가 카디건보다 대중적인 간절기 아이템으로 대세다. 필자는 이번 칼럼에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강한 카디건보다 실용적이고 저렴하면서도 기능이 카디건을 훨씬 능가하는 ‘플리스’를 소개한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플리스’는 한국에서는 원단 명인 ‘폴라 플리스’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플리스는 니트 편직 위에 기모(起毛:직물의 표면을 긁어서 보풀이 일게 하는 것) 처리를 하여 마치 양털과 같은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직물이다. 플리스는 보온성이 뛰어나며 수분이 쉽게 마르는 등의 장점을 갖고 있다. 앞서 말한 장점을 내세워 플리스 원단은 운동복뿐만 아니라 다양한 옷 소재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플리스 고유의 특징인 보드라운 결과 보온성 때문에 겨울철 어린 아이들의 옷에 안감, 겉감 할 것 없이 쓰이면서 한국 아동복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켜 이미 친숙한 소재이기도 하다. 다양한 원단 색을 뽑아낼 수도 있으며 플리스 소재로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은 실로 무궁무진해 모자에서부터 장갑, 조끼 후드, 그리고 카디건과 생활 소품에 이르기까지 찬바람이 슬슬 몸을 파고드는 가을, 겨울이 되면 플리스를 소재로 한 다양한 아이템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작년 여성들에게 크게 히트를 친 수면 양말의 경우도 플리스 소재를 이용한 번뜩이는 아이디어 상품이다. 덧붙여 플리스는 가볍고 따뜻하며 저렴하기까지 하니 일석삼조 아니, 일석오조의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는 기특한 소재로 자리를 잡게 됐다. 카디건이 포멀한 셔츠와 타이 위에 가볍게 걸쳐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플리스’는 캐주얼하면서도 실용적인 복장에 더 잘 어울린다.플리스 자체가 주는 느낌은 내추럴한 매력을 발산하지만 사실 소재 자체는 천연 섬유에 가공한 화학 소재다. 그래서 그런지 천연섬유 소재인 코듀로이(흔히 ‘골덴’이라고 칭한다) 팬츠를 함께 매치하면 묘하게 멋진 궁합을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밖에 플리스는 다른 원단들과도 훌륭한 궁합을 보여주는데, 다소 차가운 소재인 진의 경우 청바지 안감에 플리스 소재를 덧대어 훌륭한 겨울용 청바지로 탄생하기도 한다.옷 전체를 플리스 원단을 이용해 만들기보다는 운동복 소재인 나일론을 패치워크 식으로 덧대어 비싼 거위 털 바람막이 점퍼 대신 등산복으로 유용하게 입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쯤에서 간절기 아이템의 대세인 팔색조와 같은 플리스 소재를 이용한 패션 아이템으로 다양한 자리에서 자신만의 패션 감각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비법을 살짝 공개하도록 하겠다.플리스는 실속 있거나 혹은 럭셔리하거나,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주말 멋쟁이로 거듭날 수 있다. 최근 양용은 선수는 타이거 우즈와의 경기에서 멋진 우승을 일궈냈고 우승 시점과 맞물려 국내 골프 팬들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게다가 젊은 프로 골퍼들을 필두로 실력뿐만 아니라 패션으로까지 본인 알리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올가을 골프의 그린 위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젊어질 전망이다.올 가을 골프 의류들은 두꺼운 스웨터나 카디건을 입던 이전과 다르게 얇은 옷을 여러 겹 입음으로써 트렌디하게 연출할 수 있는 레이어드 룩과 믹스 앤드 매치 스타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기온이 내려가는 것에 대비해 보온성을 강조한 플리스 소재와 멜란지(mellange) 컬러의 조합이 돋보이는 보그너의 집업 점퍼와 함께 먼싱웨어의 추동용 모 혼방 바지, 그리고 모노톤 컬러를 적절히 사용한 나이키의 피케 셔츠를 함께 코디한다면 너무 튀지 않고도 세련되면서도 보온성을 갖춘 골프 웨어 룩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까지 조금은 럭셔리하게 플리스를 즐겨보았다면 이번엔 앞서 말한 것과는 반대로 실속 있는 가격으로 플리스를 즐겨 보자. 올가을 ‘베이직하우스’의 플리스는 다양함과 합리적인 가격과 함께 키즈 라인이 함께 출시돼 가족들의 패밀리 룩을 함께 연출할 수 있다. ‘베이직하우스’의 야구 점퍼 스타일의 그린, 코발트 블루컬러의 플리스 후드를 자신의 아이와 아내와 함께 매치한다면 패션을 통해 가족의 일체감을 느낄 수 도 있을 것이다. 가을 단풍 여행지에서 타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패션 패밀리가 되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이 밖에 플리스 소재의 조끼와 함께 겨울 산행이나 낚시와 같은 레저 활동 시 많이 입는 얇은 나일론 소재의 아웃도어 의상과 함께 코디한다면 좀 더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방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플리스라는 소재는 우리 주변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이미 우리 생활의 깊숙이 들어와 있다. 사실 간절기 아이템으로 소개했지만 길게 내다보면 겨울까지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효자 아이템으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의상뿐만 아니라 무릎 담요를 비롯한 모자 귀마개 등 패션 소품에서도 두루두루 쓰이는 익숙한 소재인 만큼 이번 가을, 내가 한발 먼저 가을을 마중하는 의미에서 ‘플리스, 플리즈(fleece, please!)’를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1994년 호주 매쿼리대 졸업. 95~96년 닥터마틴 스톰 마케팅. 2001년 홍보 대행사 오피스에이치 설립. 각종 패션지 보그, 바자, 엘르, 지큐, 아레나 등에 칼럼 기고. 저서에 샴페인 에세이 ‘250,000,000 버블 by 샴페인맨’ ‘행복한 마이너’가 있음.황의건·오피스에이치 대표이사 h@office-h.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