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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관혼상제(冠婚喪祭)만 봐도 그렇다. 예의나 긴장된 형식미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인간의 문화 중 많은 부분은 사회적 형식과 절차가 겉으로 나타난 것 아닌가. 문제는 절차와 격식을 따지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는 상황이다. 외교에서 특히 그럴 때가 많다.자국 대통령이 해외에서 환대를 받았다는데 기분 나쁠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반대로 국제무대나 특정 국가에 가서 푸대접을 받았다면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점에서 조금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리 대통령이 어디에서 오찬이나 만찬 환대를 받는지 아닌지, 특정한 영빈관에 초대 받았는지 그렇지 못했는지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는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국가 간 비즈니스인 외교에서 정작 우리가 무엇을 받았고 뭘 줬는지에 대해 따지는 것은 뒷전으로 밀릴 때가 많다.국빈방문 공식방문 실무방문, 그를 통한 다자·양자회담 등 대통령이 해외에서 벌이는 외교의 형식은 실제로 다양하다. 대통령의 움직임은 그 어떤 외교적 절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외교의 완성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의 외국 방문과 관련해 외형적인 대접에 비중을 많이 두는 것은 아닌지…. 가령 대통령이 상대방국 대표와 오찬이나 만찬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외교 당국자들은 생색을 내고 많은 국민도 여기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6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도 그러했다. 이 회담에서 이 대통령이 크게 환대받았다고 한다. 청와대 등이 회담 후 백악관 오찬에 의미를 두면서 특히 그렇게 강조했다.그러나 기자가 이전에 청와대를 출입했을 때 경험했던 공식 오찬·만찬장의 모습이나 그런 해외 출장에서 들은 뒷얘기를 종합해 보면 이제는 이런 단선적인 외형 평가에서 벗어날 때도 된 듯하다. 실제로 국빈 만찬이니 공식 오찬이니 하는 것이 의외로 바깥에서 짐작했던 것보다 실속 없는 경우가 많다. 그다지 얽매일 것이 아니란 얘기다.몇 년 전 기자가 동행 취재했던 우리 대통령의 아르헨티나 방문 때였다. 흔히 세계 최고의 스테이크 재료를 아르헨티나산 송아지라고 하는데 환영 만찬에 갔던 지인의 참석담은 엉뚱했다. “스테이크라고 나온 게 식어서 질기고….” 행사가 거창해지다 보니 참석자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테이블마다 막 요리된 좋은 음식을 바로 맞춰 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외국의 귀빈을 대접할 때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탄’ 계열의 중앙아시아 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평범하지 않은 메뉴로 인한 고생담도 들었다. 양국의 주요 초청 인사들은 초면에도 섞여 앉게 된다. 헤드테이블이 아니면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역시 몇 년 전, 우리 대통령이 영국 국빈방문 때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국빈방문국을 매년 수개국으로 제한한다. 대신 대제국의 전통을 살려 성대히 환대한다. 꽉 짜인 일정 중에 런던 시장의 공식 환영 만찬도 있었다. “긴 가발까지 쓰고 격식을 갖춘 인사들이 줄줄이 나와 연설하고 건배하고 3시간씩 걸렸다.” 한 참석자는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지루하고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대통령조차 종종 국빈 만찬을 잘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얘기도 들렸다.물론 국빈 만찬, 공식 오찬이라는 게 단순히 좋은 음식을 즐기자는 자리는 아닐 것이다. 손님을 대하는 자세와 환대의 성의를 평가하자는 것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국빈 오찬·만찬이 거창한 이름값도 못할 때가 많은데도 우리는 이런 유의 외형을 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젠 이런 데서 벗어나 실제로 외교적 성과가 어땠느냐를 제대로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가령 부시가(家)의 텍사스 목장에 초대받지 않았다면 홀대 받았다거나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의 초대 여부가 방미 정상회담의 성패로 이어진다는 식의 표피적 평가는 곤란하다는 얘기다.우리가 오찬과 만찬에 매달리면 청구서가 뒤따를 수도 있다. 그러한 청구서는 대개 은근하게 제시된다. 그래서 그게 그때의 점심값인지 모를 수도 있다. 백악관에서 스테이크 한번 먹고 수천억 원짜리 청구서를 받게 된다면, 그게 결국 누구 부담이겠는가. 공짜 점심은 없다고 했다.허원순·한국경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