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디자이너 이상봉은 패션을 넘어 한국 전통적인 것을 대변하는 ‘문화적 아이콘’이다. 지난 2006년 ‘한글’을 모티브로 한 그의 신선하고도 파격적인 디자인은 파리를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흥미롭게도 우리 고유의 한글을 모티브로 한 그의 독특한 디자인 세계는 해외에서 먼저 호평을 받고 국내로 ‘역바람’을 몰고 왔다. 이후 그의 화두는 줄곧 ‘한국적인 것’이 됐다.“사실 오늘도 새벽 6시까지 잠을 못 이뤘어요. 다음 시즌(2010년 봄·여름)엔 또 어떤 옷을 보여줄까 생각하다 보면 밤을 새울 때가 많아요.(웃음) 세계 경쟁 속에서 나만의 색깔을 어떻게 보여 줘야 할지가 늘 고민이죠.”파격적 발상이 세계적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만큼 디자이너 이상봉에 대한 세인들의 기대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 왔다. 반향이 커질수록 한국인으로서의, 순수 국내파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과 ‘오기’ 또한 더욱 공고해졌다. ‘이상봉(Lie sang bong paris)’은 1985년 자본금 2000만 원, 직원 3명으로 출발해 현재 직원 100명, 연매출 100억 원에 이르는 패션 기업으로 성장했다. 메인 브랜드인 ‘이상봉’을 비롯해 침구와 언더웨어 등 그의 디자인은 한지 위 먹물처럼 우리 생활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파트 휴대전화 식기 등에까지 접목된 ‘이상봉다움’은 이제 ‘아트’를 넘어 생활 문화가 되고 있다.“그저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생활용품은 너무 앞섰던 게 문제였죠. 또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서 모든 것을 관리하기엔 무리가 따랐죠. 워낙에 없이 시작했던 터라 살아남기 위해 구조조정을 할 때도 별로 연연해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비즈니스에 대한 재능도 없는 편이고요.(웃음)”이번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서울예전(서울예대의 전신) 방송연예과 얘기로 물꼬를 텄더니 예상대로 의외의 ‘과거’가 나왔다.“사실 작가가 되고 싶어서 서울예전에 진학했는데 연기에 빠지게 됐어요. 죽을 때까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졸업 후 들어간 극단에서의 첫 공연을 앞두고 제 자신의 한계가 느껴져서 1주일 남겨두고 도망쳤어요.(웃음)”프로 연극인으로서의 첫 데뷔를 목전에 두고 감행한 탈출. 한달여 시간을 갖던 중 우연히 보게 된 복장학원 광고는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안겨줬다.“집안 가장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 싶었는데 의상을 하면 연극보다는 낫겠다 싶었죠. 복장학원에 다니면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옷에 빠져 살았어요. 그때부터 벼랑 위에 나를 세웠죠.그에게 ‘벼랑’은 자존심이다. 14시즌 연속 파리 프레타포르테 전시회를 개최해 온 것도, 우리 문화를 알리려고 런던과 뉴욕 등지에서 패션 아트 전시회를 마련한 것도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열기 위한 크리에이터 이상봉의 자존심 때문이다. 국내 유명인들과 줄리엣 비노시, 린제이 로한, 비욘세 등 세계적 스타의 극찬보다 더 값진 가치다.“파리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욕심이라고, 제 자신을 더 힘들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것을 어떻게 하면 세계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더디더라도 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 되지 않겠어요? 그것이 지금까지 제가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그를 만난다면 봉투 모양의 명함을 열어보라. 봉투 속에서 그의 마음이 흘러나올 것이다. (www.liesangbong.com) 대표(현). 서울예술 방송연예과 졸업. 국제복장학원, 국제 패션디자인연구소 수료. 1983년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로 데뷔. 1994년부터 SFAA 서울 컬렉션, 2001년부터 연속 14시즌째 파리 프레타포르테 전시회 개최. 제6회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홍보대사 및 한국패션협회 이사.장헌주·객원기자 hannah315@naver.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