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블랙박스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교통사고는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 됐다. 운이 좋아서 경미한 사건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심각한 상해를 입거나 차량이 파손돼 수리비용이 많이 들기도 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차 대 차’ 사고의 경우 쌍방 간 주장이 다를 때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뀐 경우도 종종 발생하곤 한다.이때 사고 당시 상황을 입증해 줄 수 있는 목격자가 있으면 한결 수월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필요에 따라 최근 비행기에 탑재되던 블랙박스가 차량으로 확대되고 있다.사실 비행기 사고보다 차량 사고가 확률적으로 훨씬 높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추세는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차량용 블랙박스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충격을 받으면 블랙박스에 부착된 카메라와 마이크를 통해 사고 당시 상황을 기록,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일부 제품은 위성위치정보시스템(GPS)을 내장해 차량 이동 경로를 기록하기 때문에 보다 자세한 사고 상황을 분석할 수도 있다. 영상은 자체 내장된 메모리 또는 외장 메모리를 통해 저장하는데 차량 운행 시작부터 저장하기 때문에 사고 내용을 빠뜨리는 일이 없다.여기에 차량이 충격을 받으면 따로 사고 기록을 저장한다. 블랙박스가 충격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제품 내부에 장착된 센서 때문이다. 충격 감지는 위치 센서(G센서)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 센서는 물체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 움직임이 기록될 경우 교통사고로 판단하고 영상을 저장한다.무엇보다 사고 순간이 왜곡될 수 있는 운전자 증언이 아닌 영상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상대방과 과실 여부를 따지는 데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또 운전자가 수동으로 원하는 때 녹화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범죄나 위급 상황 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현재 국내에 판매되고 있는 차량용 블랙박스의 기본 기능은 차량 내부 또는 외부 상황 영상 및 음성을 저장하는 것이다. 블랙박스를 룸미러에 장착해 자체 카메라(100만 화소 이내로 제품마다 다름)를 통해 촬영한 동영상을 저장하는데 차량 전면, 차량 내부 또는 전면과 내부 모두를 녹화할 수 있다. 차량용 블랙박스에 탑재된 카메라는 볼록거울과 같은 광각렌즈(시야각 약 120~170도)를 사용해 폭넓은 화면을 저장하며 저장 기록은 자체 메모리 또는 외장 메모리카드에 담긴다.영상을 저장하는 시간은 촬영 해상도에 따라 다르다. 1GB(기가바이트) 용량 메모리는 30분 이내의 영상을 담을 수 있다. 더 긴 영상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고용량 메모리를 사용하면 된다. 대부분의 제품은 안전성을 이유로 일정 시간(5~10분)마다 각각 파일을 나눠서 저장하는데 메모리가 가득 찼을 경우 맨 처음 촬영했던 영상부터 삭제하고 새로운 파일을 만든다.영상 저장은 차량 운행 전 구간을 녹화하는 ‘상시 녹화’와 일정 충격을 받았을 때만 녹화할 수 있는 ‘충격 녹화’, 주차 시 녹화할 수 있는 ‘주차 녹화’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주차 녹화는 내장 배터리로 외부 전원 공급 없이 녹화가 가능해 주차하는 동안 차량 손괴 등을 예방,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제품은 전원을 시가 잭을 통해 공급받는다.최근 국내 중소업체 중 차량용 블랙박스를 전문으로 만드는 업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보기술(IT)을 접목해 크기를 줄이고 다양한 기능을 적용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국내 업체인 지오크로스가 개발한 차량용 블랙박스 ‘비전 드라이브 VD 3000’은 GPS, 카메라, 자체 액정표시장치(LCD)를 내장해 사고 상황을 촬영,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HD급(1280×960픽셀) 영상을 초당 15프레임으로 녹화하며 야간에도 영상을 선명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밝기 조절 기능을 탑재했다.유비원은 기능에 따라 ‘DRS-1100프로’, ‘DRS-700’을 판매하고 있다. 130화소 시모스(CMOS: Complementary Metaloxide Semi-Conductor) 센서를 내장했으며 GPS로 차량 경로도 저장(DRS-1100프로)해 준다.디오스텍은 블랙박스에 하이패스 기능을 결합한 ‘스피드 메이트 HD-1000’을 판매 중이다. 다른 제품에 비해 가격이 비싸지만 두 가지 기능을 할 수 있어 거추장스러운 케이블을 줄일 수 있다. 이 외에도 파크트로닉, 비케이테크놀로지 등 업체들이 차량용 블랙박스를 판매 중이며 가격은 제품마다 20만 원대부터 30만 원대까지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차량용 블랙박스 시장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완성차 업체와 긴밀한 협력이 중요하다. 최근 판매되고 있는 차량용 블랙박스는 비행기용과 달리 단순히 주행 상황 및 음성만을 녹화하기 때문에 ‘주행 상황 촬영 블랙박스’라고 불러야 한다. 차량 운행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저장해야 사고 정황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완성차 업체와 협력하면 사고 당시 자동차의 속도, 운행 방향, 브레이크 작동, 안전띠 착용 유무 등 관련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다.최근 일부 국가에서 차량용 블랙박스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진행 중이며 국내에도 이런 분위기가 형성돼 오는 2010년 차량용 블랙박스 의무화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자동차 사고와 관련해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에 비해 사망 사고율이 높고 사고율도 높아 도입이 시급한 상황이다. 자동차 교통사고와 관련해 우리나라 차량 1만 대 당 사망자는 3.63명으로 미국의 1.85명, 일본의 1.02명에 비해 높은 편이다.우리나라는 차량용 블랙박스 도입이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미국의 경우 2004년 출시된 승용차 80%가 블랙박스를 장착하고 있다. 일본은 2007년 기준 약 6만 대의 차량에 블랙박스가 장착됐으며 각 국가별로 2010년 이내 차량용 블랙박스 의무 장착이 단계적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유럽에선 2010년도부터 모든 차량에, 미국은 2011년부터 4.5톤 이하의 모든 차량에 블랙박스 장착을 의무화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교통사고뿐만 아니라 손님과의 요금 시비 등을 이유로 들어 일부 지자체가 버스와 택시에 차량용 블랙박스 설치를 확대하고 있다.서울시는 올해 안에 2만2000대 택시에, 경기도는 약 3만 4000대 택시에 블랙박스를 설치할 예정이다. 수원시와 인천시는 차량용 블랙박스 도입에 가장 적극적이다. 인천은 택시공제조합이 나서 법인택시 5000여 대에 블랙박스를 설치했으며 모든 택시에 이를 확대할 계획이다. 각 지자체가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차량용 블랙박스가 안전 운전을 유도해 사고율을 줄이며 손님과 시비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그러나 이에 따른 문제점도 부각되고 있다. 택시에 장착된 블랙박스는 룸미러에 장착돼 운전석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영상과 음성을 기록하기 때문에 손님들 얼굴 및 대화 내용까지 고스란히 저장돼 관련 파일이 불법 유출될 경우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차량용 블랙박스 관련 법적 근거나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도 문제다. 승객이 탑승 중에 하는 말이나 전화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것은 프라이버시권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차량용 블랙박스 확산에 따른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교통사고 예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통사고는 한순간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뀔 수도 있고 사고가 발생하면 운전자가 당황해 초동 조치를 잘못할 수 있기 때문에 차량용 블랙박스를 장착할 경우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아직 차량용 블랙박스는 가격이 비싼 편이지만 매년 내는 자동차 보험료,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재산 피해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구입할만한 가치가 있다.단, 최근 차량용 블랙박스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점을 악용해 마치 제품을 무료로 주는 것처럼 전화해 카드 결제를 유도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이런 제품은 단종된 제품이거나 애프터서비스(AS)가 불가능한 제품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전문점 등을 통해 구입하는 것이 좋다.이형근·디지털타임스 기자 brupr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