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시장

지난 2월 2일 경희대 회기동 캠퍼스는 방학 기간이기 때문인지 한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도서관 주변으로 발길을 옮기자 벤치에 삼삼오오 짝을 이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꽤 많은 학생들은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도서관 안에 들어서자 열기가 후끈 느껴졌다. 며칠 새 따뜻해진 날씨 때문일 수도 있지만 20대 초·중반의 젊은 대학생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더 큰 이유인 듯했다. 열람실 안에 들어서자 3분의 2 정도 좌석이 차 있었다. 계절 학기도 마무리됐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이 취업 준비를 하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인 듯했다.실제로 열람실 안에서 책을 빌려 읽고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이 토익 책을 펴놓고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한자 공부나 금융 관련 자격증을 준비하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전공 서적을 공부하는 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열람실에서 만난 박경준(03학번·정치외교) 씨와 송희철(03학번·정치외교) 씨는 1주일에 5~6번은 도서관에 들른다고 말했다. 박 씨는 “도서관에 오지 않으면 하루가 찜찜하다”며 “집에 있으면 패배자 같은 기분이 들어 공휴일에도 웬만하면 도서관에 나온다”고 말했다.그는 벌써 선물거래사 자격증과 한문 자격증,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토익 점수가 아직 800점대여서 점수를 더 올려야 한다고 했다. 또 공기업에 가기 위해 가점이 있는 정보처리기사 자격증도 준비할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송 씨는 “취업한 선배들이나 학교 취업 센터에는 큰 정보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취업에 성공하기 위해 “도대체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겠다”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 꾸준히 가고 싶은 기업에 대해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정보를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지원하려는 대기업이 올해 채용 인원을 10~15% 정도 줄인다고 들었다”면서 “한 번에 절반이 확 줄어든 건 아니니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들은 곧 “그래도 정 안되면 마진 좋다는 교복 장사나 해야죠, 로또도 좀 사고…”라며 말끝을 흐렸다.도서관 안에서는 아직 새내기 티를 벗지 못한 학생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정병찬(07학번·영어) 씨는 취업을 위해 학군단에 갈 예정이다. 생명보험사에 취업하고 싶은데 보험업계에서 학군단 출신을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 씨는 취업을 위해 경제·경영 관련 학과 복수 전공도 계획 중이다. 그는 “대부분 입학 때는 점수에 맞춰 온다”며 “사실 아예 취업 생각 없이 학교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느냐”며 되물었다.여학생인 양모(05학번·관광) 씨는 얼마 전까지 적성과 전공에 맞는 직장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같은 생각을 버렸다. 그는 “솔직히 공기업이나 은행처럼 여성을 많이 뽑는 곳으로 눈이 간다”며 “요즘엔 적성이 문제가 아니다. 별 관심이 없어도 일단 취업을 하는 게 급선무인 듯하다”고 말했다.취재 중 만난 학생들은 최근 많은 친구들이 학교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취업이 잘 안 되는 친구들이 ‘잠수’를 타버렸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원 준비를 하거나 로스쿨을 노리고 있는 학생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귀띔했다. 또 작년 가을까지도 선배들의 취업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지만 겨울부터는 이런 얘기를 아예 듣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그래도 학생들은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올해에는 경기가 회복되고 이에 따라 기업도 고용을 늘릴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그리고 채용 인원도 기업들이 조금씩 줄이면 줄였지 안 뽑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하지만 기업들의 대졸자 신입 채용 상황은 이들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 취업 정보 포털 사람인에 따르면 올해 채용 계획이 있는 500여 개 기업 가운데 46%가 경력직만 뽑겠다고 밝혔다. 신입과 경력을 함께 뽑겠다는 곳과 신입만 뽑겠다는 곳이 각각 27%다. 실무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경력직의 선호도가 높아지며 대졸자 신입의 취업문이 더욱 좁아진 것이다.또 커리어가 4년제 대학 2008년 졸업자 93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불과 46.2%만이 취업에 성공했다고 응답했다.그렇다고 경력직의 취업 상황이 좋다는 건 아니다. 임민욱 사람인 홍보팀장은 “작년 말부터 기업의 구조조정이 시작됐고 올해는 그 강도가 더 높아질 것”이라며 “경력직 역시 힘든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취업! 취업! 파이팅!” 3일 아침 9시 반. 종로에 있는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 1층에서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의 취업 특강이 한창이었다. 힘찬 취업 구호는 이들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2층 실업급여센터로 올라서자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이른 시각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도 드문드문 보였다. 의외로 40대 후반~50대 초반의 말쑥한 정장을 입은 신사들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말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장모(여·48) 씨는 11월 말까지 섬유 업체의 관리직이었다.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그는 “IMF 때도 이직한 경험이 있는데 새 직장을 찾기가 그때보다 확실히 훨씬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일자리만 있다면 급여를 줄여서라도 갈 수 있다”며 “꼭 사무 일이 아니라 다른 일도 상관없다”고 말했다.디자인 일을 했던 정모(여·39) 씨도 실직한 지 6개월째다. 정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이직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이제는 자리가 없다”며 “전문직이고 나이가 많다 보니 업체에서 가장 먼저 정리 대상이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불황을 이기기 위해서는 경력직의 노하우가 가장 중요한데 월급 높다고 먼저 줄이니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30대 초반인 박모(남·32) 씨의 표정은 이들에 비해 비교적 밝았다. 아직 나이도 젊고 현재 이력서도 3~4개 넣어 두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착잡한 심정이긴 마찬가지였다. 박 씨는 “정부가 취업 정보나 지원을 보다 많이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대졸 신입과 함께 얼어붙은 고용 시장의 직격탄을 맞은 건 40~50대다. 일용직이나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전문 기술을 가진 고급 인력도 마찬가지다.임민욱 사람인 팀장은 “임금이 높은 임원급 인재를 찾는 수요가 급격히 줄었다”며 “이 때문에 몇몇 헤드헌팅사는 ‘개점휴업’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귀띔했다. 임 팀장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건 30대, 경력 3~10년차의 경력직들”이라면서 ‘그나마’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강조했다.이처럼 최근의 고용 시장은 그야말로 ‘대란’ 수준이다. 일단 채용 규모가 확 줄었다. 사람인의 작년 8월 한 달 채용 공고 수는 800만 건이다. 이 숫자는 불과 한 달 만에 400만 건으로 줄며 반 토막이 났다. 또 12월께에는 또 반으로 줄어들어 200만 건에 불과했다. 7~8월이 취업의 최고 비수기이며 9월 10월이 최대 성수기라는 것을 감안해 보면 경악할 만한 숫자다.또 지난 2일 노동부가 통계청의 ‘2008년 고용동향’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비경제활동인구는 전년보다 29만7000명 늘어 경제활동인구 증가 폭인 13만1000명의 2.3배를 기록했다.특히 고용 불안이 심해진 지난해 12월 비경제활동인구 증가 폭은 경제활동인구 증가 폭의 10.9배에 달했다. 이젠 더 이상 아예 ‘일자리’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다.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이용상·장현진 인턴기자